(창세기 41:17-36, 망하지 아니하리이다)

모든 꿈이 다 하나님께서 특정한 뜻을 보여주시는 도구는 아니다.
그러나 꿈은 나만이 알 수 있는 배타적인 방식이면서도
나의 의도로 구상할 수 ─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나에게 특별한 뜻이 보이는 창구로 인식되기 쉽다.
거의 대부분의 꿈이 사실은 막연한 잠재의식의 작용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꿈을 이용하여 특별한 뜻을 보이기도 하신다.
사람이 하룻밤에도 숱한 꿈을 꾸지만 그 모든 꿈이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하나님의 계시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꿈은 계시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또한 성경에도 그렇게 기록된다.
요셉의 경우는 더욱 특별했다.
그 자신이 두 가지 꿈을 통해 하나님이 계획을 보았고, 감옥에서 왕의 두 관원들의 꿈도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뜻이었다.
그리고 바로 왕도 그러한 꿈을 꾸었다.

바로 왕도 두 관원과 마찬가지로 그 꿈의 뜻을 몰라 안절부절못하고 있다.
간밤의 이상한 꿈으로 인해 “아침에 그의 마음이 번민”했다.
이 꿈의 해석을 위해 특별히 가석방되어 왕의 앞에 선 요셉은 그러나 번민도 근심도 하지 않는다.
그는 정답을 알고 있다.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 대답을 하시리이다”라고 요셉은 말한다.
즉 요셉이 꿈의 해석의 부담을 질 일이 아니다.
요셉이 대답할 책임이 없다.
그러므로 그는 번민도 근심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는 관원들도, 바로왕도 근심하고 번민이 되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다.
꿈의 해석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제 그 사실을 안다고 해도 그들이 하나님께 물어 그 답을 알 방도를 모르기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에게 그것을 말씀하신다.
그들은 이제 요셉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대대로 성도들이 하나님 말씀을 세상에 드러내는 방식과 동일하다.
여기서 하나님의 특별한 뜻을 아는 창구로서 “꿈”은 그것을 보편적으로 드러내신 ‘성경’의 유비가 될 수 있다.
성경은 꿈과도 같이 소수에게만 하나님의 뜻이 계시된 특별한 책이지만,
성도는 이제 성경을 모든 사람이 알도록 인류의 교과서로 드러낸다.
요셉이 두 관원과 바로왕의 꿈을 해석하듯이 성도는 성경을 사람들이 읽도록 권하고 그것을 풀어 설명하여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한다.
성도는 전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의 구현을 통하여 인류를 복되게 한다.

그렇다.
요셉은 보디발 집의 복의 근거가 되었다.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인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간수장과 죄수들에게 그러한 자였다.
이제는 바로의 번민을 풀어주고 결국 애굽 나라와 백성들을 위기와 비극에서 구출할 것이다.

바로의 번민은 그가 이상한 꿈의 뜻을 알지 못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 꿈의 내용을 알게 됨으로 그는 번민에서 해방되는가?
아니다.
마치 떡 맡은 관원이 꿈의 뜻을 알지 못하여 근심하였다가 이제는 알게 되어 ─그가 사흘 뒤에 처형되리라는 것을 알게 되어─
더 이상 근심할 필요가 없게 된 것이 아닌 것과 같다.
바로는 요셉에게서 7년 풍년 뒤에 그것을 완전히 기억도 못하게 할 어마어마한 7년 흉년이 올 것을 알려주었다.
그렇다면 이제야 말로 바로의 번민이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도대체 이 재난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가!
그는 재앙을 선고 받았으니 번민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통해 그 경고에 대처할 수 있는 지혜까지 알려주신다.
하나님은 “명철하고 지혜 있는 사람을 택하여” 방책을 세우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풍년 중에 할 일과 흉년 중에 할 일을 자세히 말씀하시고 그것을 관리할 자를 세우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예 대책을 세워주셨다.
이렇게 하면 풍년을 능가할 흉년을 감당할 수 있다.
그리고 이로써만 바로의 번민이 끝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바로와 애굽을 벌하시려고 경고하신 것이 아니다.
요셉을 통해 “망하지 아니”하게, 즉 복을 주시려고 계시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성도를 통해 세상에 하고자 하시는 일이 이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