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1:1-16, 만 이 년 후에)

요셉에게 억울한 시련이 계속되었는데, 세 번째의 시련도 그와 같은 일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감옥에 갇힌 바로 왕의 고위직 두 사람에게 꿈을 해석해 주었고
일이 잘 되면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하고 부탁했다.
그는 해석의 대가로서 단순히 석방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가 무고하게 투옥되었음을 강조했다.
그는 정말로 “옥게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의 해석대로 석방되었지만 “요셉을 기억하지 못하고 그를 잊었”다.

그렇게 “만 이 년”이 지나갔다.
이것은 앞의 두 일에 비하면 억울한 일은 아니지만, 약속을 어긴 것이요 요셉으로서는 충분히 야속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그리고 감옥에서 그가 한 일을 보면
요셉이 이 년 동안 무엇을 했을지 금방 짐작할 수 있다.
자신의 선대로 누군가 석방을 하고 그가 나의 사면을 청원해주기를 약속하였을 때 나는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아마도 풀려난 그가 금방 나를 위해 사면 운동을 벌여줄 것이고 나는 곧 석방되지 않을까.
그는 그냥 범죄자가 아니라 바로 왕의 최고위직 가운데 하나인데
그가 풀려나 왕 앞에 다시 섰을 때 감옥에서 있었던 꿈과 나의 해석을 왕에게 아뢰고
왕은 그것을 희한하게 여겨 나의 문제를 재심의하게 하지 않을까.
왕이 나서면 이내 유리한 결과가 나지 않을까.
나는 곧 있을 석방을 거의 확신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것이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이 지나면 점점 실망으로 변할 것이다.
그가 나를 잊었을까?
바로 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하찮게 여겼을까?
모든 일이 참 괘씸하게 돌아가네, 이놈의 세상…
그러기가 얼마나 쉬웠을까.
실망, 원망, 분노, 체념, 그러면 애초에 이런 일이 벌어지게 된 원점으로 돌아가 형들에 대한 증오.
이런 생각이 악순환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재소자의 수감 생활은 점점 불량해질 것이다.

요셉은 이와 전혀 달랐을 것이 틀림없다.
그는 여전히 간수장이 전적으로 신뢰할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무엇보다 그에게 전혀 달라지지 않을 가장 귀중한 사실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신다!
이 두 가지 사실로 인해 그는 감옥에 있으나 석방되나
억울할 것도, 원망할 것도, 증오할 것도 없는 자다.
그는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서나 하나님을 진실하게 의지하는 자다.
그렇다.
그는 “만 이 년”을 잘 기다렸다.
그는 감옥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했다.
그 “이 년” 동안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사람─죄수, 그 약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을까!
그는 그 긴 시간을 결코 낭비하지 않았다.
그는 간수와 죄수들을 섬기며 도우며, 사실은 이끌며 거기서 하나님 일을 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사람들 다루는 일, 한 조직사회를 관리하는 일, 곧 ‘경영’을 제대로 배우고 있었을 것이다.
그냥 일상적인 일의 관리가 아니다.
가장 불만이 많고 피해의식으로 복종을 거부할 맨 밑바닥 세계의 사람들을 그가 다뤘다.
나중에 다윗이 아둘람 굴에서 형성한 그 최초의 공동체,
곧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들 “사백 명 가량”의 “우두머리”가 되었던 그 경험이
그를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훌륭한 이력으로 될 수 있었던 것과 같지 않을까.
요셉이 그에게 이 년 뒤에 어떤 일이 있을지 알지 못했고,
그가 보디발 집과 감옥에서 맡았던 일과 비교할 수 없는 초강대국 애굽의 나라 일을 맡게 될 줄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어도,
그는 그 일을 위해 차근히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적어도 그가 무엇을 위해 기다리는 줄을 몰라도 하나님께서 맡기실 일을 위해 준비되고 있는 것은 확신했을 것이다.

요셉은 그 준비를 성실하게 감당했다.
노예로서, 죄수로서도, 기다리고 기다려야 하는 긴 시간 가운데도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준비시키고 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는 어떤 억울함이나, 인간에 대한 실망이 고조될 이유들 가운데도
가장 중요한 것을 놓지 않았다.
잃지 않았다.
하나님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실,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하게 하시는 사실.
그리하여 “만 이 년 후에” 바로의 “꿈”
─오늘 본문에 “꿈”이라는 단어가 열 번이나 나온다. 다급한 것은 요셉이 아니라 바로였다!─으로 인해 그가 감옥에서 나왔을 때
그는 이 년 전의 말을 똑같이 다시 한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편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그는 왜 2년이나 걸렸을지 그 원망, 적의, 증오를 내내 간직하고는 그것을 토해내지 않았다.
그가 간직하고 다시금, 언제라도 할 말을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그 진실이다.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거듭 주어졌던 말씀,
곧 “남은 자”, 그는 이렇게 요셉과 같이 긴 시간을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하나님께서 형통케 하심을 든든히 의지하는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