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0:1-23, 근심 있는 자와 없는 자)

요셉은 억울하게 애굽으로 팔려와 종이 되었고,
더욱 억울하게 주인을 배반하고 치한으로 돌변했다는 누명으로 죄수의 신세가 되었다.
노예와 죄수, 이들은 그 이유가 어떠함에 상관없이 인간이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에 있는 자들에 속한다.

요셉이 있는 감옥에 두 사람이 끌려왔는데 그들은 상당히 높은 자리에 있던 인물들이다.
바로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왕의 최측근에서 생명과 직결되는 음식을 맡은 자들이다.
그들이 옥에 갇힌 것은 “왕에게 범죄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 “범죄”가 요셉과 같은 근거 없는 ‘누명’, ‘모함’인지,
실제로 죄를 지은 것을 의미하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나중에 나타난 결과로 추정하여
한 사람의 범죄는 확실하고 다른 사람은 누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
아니면 둘 다 죄를 범하였는데 한 사람은 정상참작의 여지가 없었고 다른 사람은 사면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노예와 죄수의 신세, 그 자체는 가장 암울한 형편임이 분명하다.
억울하게 끌려 왔으면 무죄함으로 양심은 당당할지 모르지만
오히려 그 떳떳함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너무도 열악한 현실로 인해 고통과 증오심과 원망이 더 클 수도 있다.
마땅한 이유로 그 자리에 있는 자라면 죄의식이나 수치심이 양심을 괴롭힐 것이다.
그 자리에서는 누구나 “근심”하게 될 것이다.

바로의 두 신하는 아마도 하루아침에 하늘에서 땅속으로 떨어진 듯한 급격한 신분하락으로 정신이 혼미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같은 밤에 꾼 꿈으로 다음 날 아침에 “근심”에 쌓인다.
무엇을 암시하는 것이 분명한 꿈인데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고,
그 암시란 아마도 그들의 운명과 관련될 것이므로 “근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현실도, 그들의 미래도 “근심”뿐이다.
요셉은 이들의 얼굴에서 “근심의 빛”을 금방 알아봤다.
그것은 요셉이 “근심”하지 않는 사람임을 반증하는 것 같다.
요셉이야 말로 억울하게 감옥까지 끌려왔고, 그야 말로 아무 데도 부탁하고 의지할 데가 없는 외국인, 나그네, 노예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억울한 신세에 함몰되어 아무것도 돌아볼 수 없는 눈먼 자가 되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사람들의 안색을 정확히 판단할 만큼 시야가 넓었고 시력이 뛰어났고 통찰력이 깊었다.
그것은 “근심”하는 상태에서 나타날 수 없는 지각이다.

요셉은 감옥에서 그 두 사람을 “수종”드는 일을 맡았지만
이제는 그들의 상담역할까지 맡게 되었다.
그것을 그가 자처하였는데
그가 “근심”하는 자가 아니라 마음이 평온하고 남을 배려하는 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그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는 이유가 지난밤의 “꿈” 때문인 것을 알고
이제 적극적으로 그들을 위할 수 있는 자가 된다.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이것이 그들의 “근심”의 원인이었다.
우선 꿈의 뜻을 모르는 것이 두려웠다.
사실은 꿈의 뜻을 모르기 이전에 이들 마음에 “근심”이 있었던 것 아닌가!
요셉은 꿈의 모든 의미를 알기 때문에 걱정 없이 사는가?
요셉의 평안과 지혜는 꿈을 아는 능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믿는 하나님께 기인한다.
요셉이 그것을 강조한다.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그런데 그 두 사람의 꿈 내용은 비슷한 듯한데 그 뜻은 상반되었다.
요셉의 해석으로 ─요셉이 말한 대로 하나님께서 꿈을 해석해주셔서─
둘이 꿈의 뜻을 알므로 이제 그들의 얼굴에서 “근심의 빛”이 사라졌는가?
아니다.
한 사람에게서는 분명히 사라졌지만 다른 한 사람은 꿈의 해석을 모르던 때보다 더욱 “근심”하게 되었다.
한 사람은 사면되고 다른 한 사람은 사형된다.
이 다른 운명 앞에 “근심” 없는 자와 “근심” 있는 자로 갈린다.
결국 꿈을 해석하지 못해 “근심”한 것이 아니라 꿈의 의미가 이로우냐 해로우냐에 따라 진짜 “근심”의 여부가 갈릴 것이다.

요셉은 어떠할까?
만일 요셉이 꿈을 꾸고 하나님이 주신 해석을 통해 자신이 사면되거나 또는 그 반대로 처형을 당하게 될 것을 알게 된다면, 그는 어떠할까?
사면은 평안이요 사형은 “근심”일까?
물론 그가 죄 없이 억울하게 시련을 당한다는 이유로 그 역경을 즐기거나 감옥을 휴양지로 여기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집에서 나를 건져”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그것이 억울함과 감옥의 열악한 형편과 혹시 처형으로 끝날지 모르는 상황으로 인해 그가 “근심”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는 이미 산전수전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하게 하심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러므로 그를 좌우하는 것은 그의 억울한 현실, 또는 불안한 미래 상황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시다.
그의 “근심” 없는 근본적 평안은 평안한 미래의 확실한 보장에 근거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하나님께서 그를 형통하게 하신다.
그 사실, 그 믿음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 이 믿음이 없는 자는 꿈의 해석을 알지 못해 얼굴에 “근심의 빛”이 묻어나고,
사형 여부에 따라 “근심”이 좌우된다.
나의 상태에 따른 “근심”의 여부가 아니라,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라는 사실로 인한 “근심” 없음.
이것이 요셉이 보여주는 성도의 믿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