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4:1-18, 질그릇 속의 보배)

사람의 눈은 겉만 보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속에 있다.
속에 무엇이 있는가가 그를 결정한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이다.
속에 “숨은 부끄러움의 일”로 가득하면서도 얼마든지 “속임으로” 겉을 화려하게 미화할 수 있다.
그때 세상은 그를 높일 것이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높아질 수 없다.
그의 겉이 아니라 속에 있는 것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신”(사탄)의 훼방에 의해 마음이 “혼미하게” 되어 복음을 믿지 못하는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을 때 우리가 믿게 되는 것도
다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복음의 거부(불순종)냐 영접(순종)이냐는 사람의 겉에서가 아니라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요
그것이 그를 결정한다.
믿음은 결코 체면치레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각 사람의 양심”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새로운 언약의 사역자”, 곧 “영의 직분”을 맡은 자는 바로 이것을 위해 일하는 자다.
그는 과시하기 위한 통계수자가 아니라
한 영혼에 대한 진실한 사랑과 하나님 나라로 회복되는 세상 모든 영역의 구원을 위해 사역한다.
그는 겉을 위해서가 아니라 속의 변화를 위해 일하는 사역자다.

겉과 속, 이것은 또한 모든 성도에게 따라다니는 믿음의 본질적 현상이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이것을 “질그릇”과 “보배”, “우리 죽을 육체”와 “예수의 생명”, “겉사람”과 “속사람”, “환난의 경한 것”과 “영광의 중한 것”, “보이는 것”의 “잠깐”과 “보이지 않는 ··· 영원함”으로 대조한다.
성도는 “질그릇”이라는 겉에 “보배”라는 속을 가진 자다.
“우리 죽을 육체” 안에 “예수의 생명”이, “겉사람” 안에 “속사람”이 있는 자다.
“환난의 경한 것”에 둘러싸여 있지만 그 속에 “영광의 중한 것”을 가지고 있으며,
“보이는 것”이 고통스럽지만 그것이 “잠깐”임을 알아 결국 참아내어
“보이지 않는 ··· 영원함”을 따르는 자다.

성도는 겉이 아니라 속에 진실이 있음을 안다.
겉이 어떻게 보이든 그것은 “낡아”진다.
그것은 사실 “잠깐” 사이에 일어난다.
사람의 이목과 고통스런 현실도 “잠깐” 사이에 변화될 한시적인 것이다.
물론 그 시간적 길이와 속도는 사람의 감각으로는 매우 길고 느리다.
고난은 오랫동안 계속되는 것으로 느껴진다.
단지 느낌이 아니라 실제로 인간의 육체 나이에 비하면 매우 길기도 하다.
실제로 평생 고난 속에 살기도 한다.
그러나 성도가 아는 본질은 인생의 길이와 세월의 흐름을 훨씬 넘어선다.
혹 임산의 수고와 그 이후 아이로 인해 얻을 평생의 기쁨,
요즘은 1년 반으로 줄어들었지만 그래도 고생스러운 군복무와 제대 후 평생의 자유로움,
이런 대조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것은 “잠깐”과 “영원”의 차이다.
그것은 “죽음”과 “생명”의 간극이다.
이 차이를 분명히 아는 것이 성도의 지혜다.

그러나 이 겉과 속의 차이는 또 다른 진실을 가지고 있다.
성도는 “보배”를 가진 “질그릇”이다.
그 곳에 “보배”가 있는 “질그릇”이라면 그것은 참으로 귀한 “질그릇”이다.
속에 아무것도 없는 사기그릇이나 놋그릇보다 오물을 담은 도자기보다 “보배”가 들어있는 “질그릇”이 더 귀하다.
성도는 그 안에 “보배”가 있는 자다.
그 “보배”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이며 “하나님의 영광”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몸(“질그릇”)을 귀히 여긴다.
함부로 쾌락과 죄악의 도구로 남용하지 않는다.
그 안에 있는 “보배”로 인해, “보배”를 위해 자기 몸을 조심하고 보호하고 귀하게 사용한다.
성도는 “죽을 육체”를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저주스러운 육신, 아무 가치 없는 인생이 아니다.
그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성도는 자신의 “죽을 육체”가 사는 동안 그 “육체”로 사람 살리는 일을 하며
그 인생의 짧은 길이도 감사히 여긴다.
성도는 “환난” 속에 살지만 “영광”이 그를 기다리고 있는 자다.
그러나 그 “환난”은 그냥 눈 딱 감고 이를 악물고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는
“영광”과 관계없는 무익하고 불필요하고 부수적인 것에 불과한 쓰레기가 아니다.
그 “환난”으로 성도는 강하게 되며 인내를 배운다.
그리하여 그 “환난”을 기꺼이 당한다.
성도는 “환난”을 피하는 자가 아니라 잘 “견디는” 자다.
그것이 “영광”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는 것을 안다.
성도는 또한 “보이지 않는 ··· 영원함”이 보장된 자이지만 “잠깐 “보이는 것”을 결코 경시하지 않는다.
세상은 그것이 목적이 되고 의미가 되어 그것에 목을 매달지만,
성도는 그것을 우상으로서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 영원”한 것을 드러내는 창구로 삼는다.
그는 “잠깐” 동안의 “보이는 것”을 통해 자신에게, 이웃에게
“보이지 않는 ··· 영원”한 것이 얼마나 귀하며 아름다우며 선한지를 보여주는 자로 산다.
성도는 속을 위해 겉을 중시한다.
속의 진실을 위해 겉의 진실을 참으로 존중한다.

성도는 “질그릇” 같은 비천함과 “환난” 속에 “잠깐”을 살아도
“예수의 생명”이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는 삶을 사는 자다.
“이 세상의 신”에 미혹된 자에게는 저주가 될 그 “겉사람”의 ’후패함‘과 달리
성도는 그 “겉사람”을 “속사람”이 “날로 새로워지”도록 귀한 도구로 삼는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