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8:1-30,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그 후에 유다가 자기 형제들로부터 떠나 내려가서 아둘람 사람 히라와 가까이” 하였다.
“형제들로부터 떠나”게 된 일이 불길하다.
아브라함 집안의 신앙의 계대는 일단 한군데에 함께 삶으로써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롯이 아브라함과 이별하고, 이스마엘이 집을 나가고, 에서가 야곱(과 이삭)을 멀리 떠남으로 모두 믿음에서 멀어져 갔다.
반면 야곱의 열두 아들은 모두 한군데, 또는 근거리에 살다가
함께 애굽으로 이동하고 어느 아들─후에는 지파─도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유다가 “형제들로부터 떠나”는 일화가 오늘 본문의 배경이다.
그리고 일이 벌어진다.

우선은 가나안 여인과 결혼했다.
이삭도 야곱도 멀리 떨어진 조상의 고향사람들, 즉 친족들에게까지 가서 결혼을 했다.
그것은 전적으로 신앙적 일체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야곱은 열두 아들 가운데 누구도 결혼을 위해 하란으로 보내지 않았다.
그렇게 보면 유다만 탓할 일은 아닐 수 있다.
그리고 나중에 유다의 아이를 낳을 다말이 한 일을 보면
오히려 이 가나안 여인이 유다에게서 “그는 나보다 옳도다”라는 인정을 받게 됨으로
이방여인이라는 이유를 들어 함부로 말할 수도 없다.

가나안 여인과의 결혼 문제보다 더 중요하고 심각한 것은
유다가 믿음의 집안사람으로 썩 신의를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유다는 장남 엘이 죽자 둘째 오난을 통해 형사취수(兄死娶嫂, 또는 계대 결혼)의 의무를 하게 한다.
이것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오난이 죽는다.
아직은 “율법”이 주어지기 이전의 시기이며 이것이 다른 지역의 풍습이기도 하지만,
모세의 율법에서(신명기 25:5~10) 명시될 것이며,
또한 오늘 본문에서도 오난의 행위를 하나님께서 벌하시는 것으로 봐서
이 관행은 상속자가 없는 미망인─약자 중의 약자─을 배려하는 중요한 사회적 장치라 할 수 있다.
유다는 오난의 죽음으로 멈칫 했고 셋째 아들 셀라가 장성한 뒤에도 며느리 다말에게 그를 주지 않았다.
유다는 약자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갖지 않은 것이다.

그는 부인을 사별한 뒤의 적적함을 풀기 위해 그 지역─아둘람─에서 그가 “창녀”로 생각한 여인을 만난다.
만일 그가 아버지와 형제들이 있는 같은 마을에 살았다면 이런 일탈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영리한’ 다말이 대를 얻기 위해 시아버지까지 유혹한 부끄러운 음모가 행해지기는 했지만,
그 빌미를 만든 것은 유다 자신이었다.
그는 창녀가 아닌 여인을 “창녀”로 본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그녀에게 담보로 주었던 물건들을 되찾으려 하다가
그 동네에 “창녀”가 없다는 말을 듣고 그는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할까 하노라” 하고 반응한다.

유다를 주춤하게 한 것은 “부끄러움”이었다.
사실은 이 일로 인한 내적 수치심을 그가 느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부끄러운 대상이 될까 두려운 것이었다.
─다른 번역의 말을 옮기면, “괜히 우리만 망신당할까봐 걱정일세”, 또는 “잘못하다가는 창피만 당하겠네”─
그의 부끄러움에 대한 의식은 사람들 앞에서의 망신과 창피였다.
그는 그가 한 일 자체의 “부끄러움”, 즉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아, 그리고 나의 내밀한 모습을 바로 여기서 본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의 양심보다 사람의 눈과 말에 의한 부끄러움에 더 민감하다.
아마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기만 한다면 꽤 많은 죄를 저지르는 데 겁이 없을지 모른다.
하나님이 뻔히 보시는데도 말이다.
나의 양심의 기준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들의 눈과 말에 의해 결정되기가 얼마나 쉬운가!

다말이 약자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결국 이루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상속자를 얻기는 했지만
그 방법은 결코 하나님의 인도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후의 율법에 의하면 분명히 죄였다.
그럼에도 다말에게 변명의 여지가 있다면 유다의 잘못 때문이다.
유다가 이 과부 약자를 더 제대로 돌볼 생각이 있었다면 여러 범죄가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파행적 가문의 계대를 통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역사다.
그러나 설령 하나님의 은혜가 거기서 나타나도 인간의 죄는 그 어떤 것도 정당화될 수 없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로마서 5:20)지만,
우리는 결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6:1)는 일을 할 수 없다.
드러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이다.
사람의 죄는 하나님의 은혜를 불러일으키는 도구로 조금도 높여지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