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3:1-18, 새 언약의 일꾼)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바울에 대해 제기되었던 문제의 핵심은 그의 사도직에 관한 의문이었다.
신학적인 문제제기든 인간적인 선호 내지는 혐오의 문제든
바울은 이에 대해 변명이나 해명으로 맞서지 않는다.
그는 누구의 추천서도 또는 자신의 진술서─‘자화자찬’이 될 “자천”─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사도직, 그것은 어떤 증명서가 입증해주는 자격이 아니었다.
사도들은 혹 예루살렘 교회가 발행해준 사도 자격증을 소지한 자들이 아니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보내시려는 특별한 사명을 받은 자로 오로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다.
그리고 그는 당연히 교회에 의해 공인된다.
공인이란 오늘날처럼 시험이나 투표를 거쳐 무슨 안수식이니 위임식 같은 것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사도됨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는 중에
자연스럽게 교회가 그를 인정하고 그 권위가 드러났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드러내기 위해 쓴 문서가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자천”도 아니요 타인의 “추천서”도 아니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쓴 “편지”가 곧 그가 사도인지 아닌지를 보여주는 증명서일 것이다.
그 편지란 그가 앞에서 쓴 ‘고린도전서’와 같은 서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누가 교회에 편지를 띄운다고 다 사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이 “편지”를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 썼”다.
바울이 누구인지는 이미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 새겨져있다.
바울이 여기저기서, 특히 고린도에서 사역하고 교인들과 함께 하고, 그들을 위해 수고했던 것,
바울의 됨됨이 모든 것이 하나도 숨김없이, 즉 위선적으로 어느 장점만 부각되는 것 없이,
즉 그의 투명하게 드러난 ─공개된─ 삶을 통해 누구든지 그가 누구인지 다 알고 있다.
그에게 감추어진 것이 없다.
그가 누구인지는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 이미 써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인 것이 고린도 교인들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다면 사도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왜냐하면 사도가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 쓴 편지는
사실 “우리의 편지”를 넘어 “그리스도의 편지”이기 때문이다.
바울과 그 동역자들이 썼지만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쓰신 편지였다.
사도들은 예수께서 이렇게 쓰셨을 그 편지의 내용대로 산 자들이다.
그것은 자기 권위나 자기주장의 관철을 위해, 결국 자기를 높이기 위해 쓴 편지가 아니다.
그것은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었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내가 누구다’라고 말하고 다니고 자신을 잘 보이기 위해 세뇌시키고 자기 사람으로 만든 것이 아니다.
그가 누구인지, 무엇을 했는지를 “하나님의 영”이 고린도 교인들의 마음에 쓰셨다.
바울이 사도임은 인간의 자천이나 추천서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영”이 쓰신 “편지”를 통해 드러난다.
“하나님의 영”이 고린도 교인의 마음을 감화해서 바울이 누구인지 바로 알 수 있다.
그리하여 일정의 계획으로 인해 생긴 오해도 설명하는 가운데 이해로 바뀔 수 있고,
특히 노골적으로 적대했던 자들도 간곡한 편지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오며
교회가 용서할 수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으로 쓴” “그리스도의 편지” 아닌가!

바울이 사도직의 근거를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변명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는 사도가 성도들의 마음에 쓰인 편지, 즉 “하나님의 영으로 쓴” “그리스도의 편지”이듯이
결국 모든 성도들이 이와 같이 “새 언약의 일꾼”으로 부름 받았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그 직분은 “율법 조문의 직분”이 아니라 “영의 직분”이다.
특정 혈통─레위 지파, 그리고 아론의 자손과 같은─에 부여한 “율법 조문의 직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은 그 조문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영의 직분”을 얼마든지 부르신다.
먼저는 사도가, 그 다음에는 예수를 믿는 모든 성도가
이 “새 언약의 일꾼”으로, “영의 직분”에 부르심을 받는다.

바울은 “율법 조문의 직분”과 “영의 직분”을 구약 선지자의 예를 들어 비교한다.
모세가 십계명을 가지고 내려올 때 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의 빛으로 인해
백성들이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하고 수건을 씌워야 했다.
그러나 “새 언약의 일꾼”, 곧 “영의 직분”은 그 수건이 벗겨진 “자유”로운 직접적인 대면으로 “주의 영광을 보”는 자다.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진다.
모세의 밝아진 얼굴조차 볼 수 없던 육안의 연약한 시력을 넘어서
하나님의 영은 주님의 그 놀라운 영광을 우리로 직접 대면하게 하도록 우리의 영안을 뜨게 하신다.
바울은 먼저 쓴 편지에서 이미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
주께서 주시는 “사랑”의 능력을 노래했다.
성도는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을 읽을 줄 아는 자다.
그리하여 바울이 누구인지도 ─왜냐하면 바울 자신이 “하나님의 영으로 쓴” “그리스도의 편지”이기 때문에─
고린도 성도들은 알 수 있었다.
그들 마음에 이미 그 지식─바울이 누구인지, 바울이 전한 복음이 무엇인지─이 새겨져 있었다.
내가 참으로 깨끗한 마음으로 이것─복음에 대해, 사람에 대해─을 잘 알아야 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