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23-2:17, 근심을 넘어 기쁨으로)

바울 사도와 고린도 교인들 사이에 생긴 문제는 인간의 이해력 한계로 인한 오해도 있고,
분파적인 적대로까지 이른 악의적 곡해에 의한 것도 있었다.
전자는 자초지종을 잘 설명하면 오해가 풀릴 수 있는 문제다.
고린도 교회에 방문할 계획이 다소 변경된 것으로 인해 생긴 오해에 대해
바울은 그것이 “육체의 지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으로 된 것임을 밝혔다.
혹 일정이 변하여도 하나님의 약속은 그 신실하심으로 반드시 이루어지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께 “예”라고 순종할 뿐이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육체적인─ 기준에 의한 편견과 판단으로 야기된 적대는
단순히 이해하는 것만으로 해결될 것이 아니었다.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제기는 바울 개인에 대한 시비가 아니라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한 거부이며 ‘다른 복음’을 위한 빌미가 될 것이었다.
그것은 단호하게 시정되어야 했다.
이에 대해 바울 사도는 주님의 복음을 재차 명시하고 그 불순종에 대한 회개를 촉구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 교육은 잘못된 것을 노출시키고 그것을 시정해야 하는 당위성이 드러나므로
해당자에게는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다.
바울은 그것이 그들에게 “근심”을 야기하는 것임을 잘 안다.
사실 “근심”은 이들에게서가 아니라 바울에게서 먼저 시작되었다.
복음을 배운 자가 그것을 왜곡하고 잘못된 길을 갈 때
가르친 자는 얼마나 “근심”이 되겠는가!
복음은 단순한 지식의 전수가 아니며 학문적 논쟁이 아니다.
그런 것은 얼마든지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으며 논쟁을 통해 더 나은 답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는 인간의 주관적인 토론에 의해 이렇게 또는 저렇게 추구되는 이론이 아니다.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답이다.
이것은 풍부함을 추구하는 다양성 경쟁이 아니라 생사가 달린 단호하고 결연한 정답과 오답의 양자택일 문제다.
잘못을 시정하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고
시정하면 생명에 이르는 심각한 문제 앞에 있는 자들을 위해 바울은 몹시 “근심”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일반적으로 “근심”을 부정적, 파괴적이요 “기쁨”은 긍정적, 생산적으로 양분하기 쉽다.
그러나 파괴를 야기하는 “근심”이 있는가 하면 생명을 위한 “근심”도 있다.
바울을 적대하는 자들이 전자의 근심을 야기했다면 바울은 후자의 근심을 제공한다.
그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근심”해야 한다.
“근심”하지 않으면 고칠 수 없고, 고치지 않으면 죽음에 이른다.
이들의 문제는 바울뿐 아니라 교회 공동체 모두의 “근심”이 된다.
이들은 하나님 앞에 참으로 “근심”함으로 회개하며, ─회개에는 권징, 즉 “벌 받는 것”도 포함된다─
그리하여 살 길로 가야 한다.
죄에 대한 “근심”은 회개를 낳고, 회개는 생명 구원으로 향한다.

그러나 이들로 인해 “근심”한 교회 공동체는 이들의 “근심”과 회개를 보고
이제는 “용서하고 위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하셨듯이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야 한다.
그들이 죄를 지은 대상인 예수님이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시는데
교인들이 그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되겠는가!

결국 이 “근심”은 결국 파괴적인 죽음의 근심으로 귀결되는 근심의 악순환이 아니라
생명을 낳는 기쁨의 ‘선순환’이다.
그렇게 된 이유는 바로 바울이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고자 했기 때문이다.
잘못을 고치는 “근심”어린 작업이 자칫 진실로 기쁨을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근심”에 빠져 망하게 하는 일일 수도 있다.
사랑으로 “근심”케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없이 오직 비판으로만 일관되는 “근심”케 함은 결코 “기쁨”에 이르지 못하며,
그것은 “기쁨”을 위한 것이 아니었음으로 판명된다.

“기쁨”을 위한 “근심”의 과정에서만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
그 반대의 경우는 ─“근심”만을 목적으로 하는 잘못의 추궁─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날 뿐이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흠뻑 나타내신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내게서도 풍겨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