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1-11, 위로 받고 위로하는 자)

고린도후서는 첫 편지와 다른 분위기로 시작한다.
고린도전서에서와 같은 찬양, 감사의 서두 인사말을 간략하게 줄이고
바로 당면한 현실의 상황에 직접 대면한다.
그것은 “환난”과 “고난”의 문제였다.
이 단어들이 계속 이어진다.
아주 심각한 상황이었다.
그것은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이었으며 “살 소망이 끊어지고”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을 정도였다.
이것은 복음의 최전선에서 맹렬한 수고를 하고 있는 사도들의 상황을 묘사한 말이기는 하지만
고린도교회, 그리고 당시의 모든 초대 교회가 겪는 일반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바울 사도가 죽을 것 같은 이 환난의 고통 가운데 받은 하나님으로부터의 “위로”를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전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고난도 심각하기 때문이다.

오늘 본문은 가히 “위로”로 넘친다.
아, 그것은 물론 환난이 넘치기 때문이다!
이 “위로”가 하나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이 우선 중요하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자비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다.
“위로”란 무엇인가?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줌’으로 사전에는 나온다.
위로는 다분히 심리적인 조처로 인식된다.
마음을 달래주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신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비위를 맞춰주는 것, 문제를 외면하고 눈을 다른 데로 돌리게 하는 최면효과,
모든 것을 낙관적 긍정적 적극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사고방식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고난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난에 잘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고난은 무조건 슬프고 두려운 것이 아니다.
성도가 왜 고난을 받는지를 안다면 그 고난에 잘 “참여”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졸지에 영문도 모른 채 그저 음모에 빠져 당혹스런 고통의 늪에 빠지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그 고난을 위해 오셨다.
그것이 예수께서 이루실 구원과 직결되는 경로였다.
그 분명한 목적의식, 사명감을 가지고 예수님은 고난을 준비하셨다.
성도는 이 세상이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과 성도를 대적하는 것을 바로 안다.
그리하여 자신이 왜 고난 받는지를 안다.
예수께서 하신 일은 고난을 그저 당한 것이 아니라 “고난에 참여”하신 것이다.
성도의 고난관도 그와 똑같다.
하나님의 위로는 그것을 잘 하게 하시는 것이다.
고난을 벗어나게 하는 것, 그것을 피하고, 가볍게 하도록 특별한 심리기법을 비법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곧 “고난을 ··· 견디게” 하신다.
고난이 사라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잘 견디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감화하셔서 성도의 본분과 세상의 본질을 잘 알게 하시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당혹감에 빠지지 않고 정확히 파악하고 대처하게 하신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지실 때 하셨던 것과 같은 태도와 지식을 배우게 하신다.
그것은 단지 이를 악물고 참아내야만 하는 인내력 강화훈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셔서 우리로 알게 하시는 진실은 곧 분명히 다가오는 미래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것은 바람이나 기대나 주관적 상상이 아니라,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만드시는 사실이 있다.
이것을 바로 알게 도우신다.
그것을 아는 것이 곧 “소망”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는 “소망의 견고”함으로 “고난을 ··· 견디게” 하시는 것이다.
모든 것이 사실, 곧 진실에 의거한다.
얼마나 즐거운 상상을 하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진실한 사실인가에 “위로”가 달려있다.
그냥 마음만 달래주고 흡족하게 느끼게 해주는 것이 위로가 아니다.
진정한 사실에 제대로, 잘 직면하게 돕는 것이 “위로”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십자가의 고통이 별 것 아니라고 진실을 위조하지 않으셨다.
십자가 위에서 마취효과를 해주시겠다고 거래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예수께서 분명히 알아듣도록 ‘이 고통의, 죽음의 잔을 옮길 수 없다’는 진실을 밝히셨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용감하게, 영웅적으로 절망에 빠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 뒤의 부활, 고난 뒤에 있는 구원이라는 그 진실, 그 사실을 분명히 알게 하신다.
그 분명한 사실을 제대로 “소망”하도록 그 소망을 “견고”하게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그가 이 위로를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으로 멈추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위로로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능력을 말한다.
하나님께 위로 받은 자는 그 위로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이제 위로하는 자가 된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위로를 받은 이유를 분명히 알았다.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다.

내가 문제와 상황에 절절 매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죄로 인해 고난 받는 일이 없어야 하며,
오직 성도로서 믿음대로 살다가 고난을 받는 진실을 제대로 알아서 그것을 잘 견디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 모든 일이 분명히 귀결될 하나님의 구원을 견고히 소망하는 자로 지금의 문제들에 흔들리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고난 가운데 수고하는 자들, 연약한 자들에게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위로를 온전히 나누는 자가 ─가르치는 자가 아니라─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