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9:29-50:14, 조상들에게로, 선조와 함께, 백성에게로 가는 길)

야곱이 숨을 거두었다.
그는 “나그네의 길”로 “험악한 세월”을 살았지만 마지막에 크고 놀라운 복을 누리고 죽었다.
그의 열두 아들 각각을 위해 깊이 생각해온 말씀을,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통찰한 각 지파와 이스라엘의 미래를 내다보는 그 말씀을
하나씩 들려주고 그는 이 땅에서의 생을 마쳤다.
그는 모든 것을 다하고 숨진 것이다.
이 세상에서 성도가 ─그는 특히 믿음의 조상으로서─ 할 가장 중요한 일을 다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갔다.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죽음에 대한 성도의 정의를 모범적으로 보여준다.
야곱은 “내가 내 조상에게도 돌아가리니”라고 말을 시작한다.
그의 죽음은 “조상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죽음 뒤의 처치, 곧 장사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지시한다.
“나를 ···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그러한 장사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장지의 역사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한다.
그 이야기를 ‘역시 다하고’ 그는 “숨을 거두”었다.
성경은 그가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고 진술한다.

여기에 죽음에 대한 반복된, 동일한 표현이 있다.
“조상에게로 돌아가”는 것, “선조와 함께 장사”하는 것, “백성에게로 돌아”간 것.
“조상”과 “선조”와 “백성”은 같은 뜻이요 동일한 사람들이다.
야곱은 그들이 누구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그의 조부모와 부모, 이들은 조상과 선조에 해당되며,
그의 아내 레아는 그의 백성에 속한다.
야곱이 지금 혈통적인 의미에서 조상과 선조와 백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당시에 그들은 모두 한 혈통이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게 그들은 신앙적으로 한 가족이다.
하나님을 믿는 공통된 믿음의 공동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것은 단지 히브리 민족의 형성이 아니라,
또는 장차 있을 이스라엘 국가의 설립이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을 다 포함하는 온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약속을 위한 것이었다.
그들 모두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에 초대될 것이며 그 ‘믿음’이 요구될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이 “복”을, 즉 ‘구원’을 얻을 날을 예비하신다.
야곱이 언급하는 “조상”과 “선조”와 “백성”은 이 맥락에서만 의미가 있다.

야곱은 자신의 죽음을 세상에서 흔히 말하듯 끝으로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조상”과 “선조”와 “백성”을 말할 때
그들은 야곱이 갈 방향, 목적지이며 ─그리하여 “조상들에게로”, “백성에게로”─
또한 야곱이 여전히 있어야 할 곳─그리하여 “선조와 함께”─이다.
“에게로”와 “함께”는 미래이면서 현재다.
죽음은 정지된 끝이 아니라 성도가 앞으로 나아갈 목적이 있다는 것을 명시하며
현재 함께 할 자들이 있다는 것을 밝힌다.
야곱은 믿음의 조상과 백성에게로 돌아갈 것이며 ─결국 그들에게로 돌아갔으며─
그리고 선조들과 함께 장사될 것이다.
장사는 시신을 처리하는 방식인데 구체적으로는 선조들이 장사된 동일한 장소,
곧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굴”에 장사될 것이다.
거기서 조상들의 유골과 나란히 누일 것에 야곱이 의미를 두는 것은 아니다.
장지가 어디인가, 그곳이 동일한 장소인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다.
시신이 되어 함께 누이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조와 “함께 장사”되는 것이 아니라
“선조와 함께” 장사되는 것이다.
아브라함 이후로 세상의 구원을 향한 사명과 소명에 부름을 받은 믿음의 자손들은
모두 “함께” 이 사명과 소명을 감당한다.
그것을 “함께” 나누며 “함께” 수고한다.
야곱은 숨을 거두므로 그의 몸이 움직일 수 없지만
그가 말한 대로 “선조와 함께”라는 정신은 이제 그의 열두 아들들, 그들의 아들들, 그들의 믿음의 모든 자손들이
“선조와 함께” 하나님께 나아감을, 하나님의 일을 함을, 그 동역과 그 공동체성을 뜻하는 것 아닌가.

특히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달리 그의 아들들, 열두 아들 모두가 이 믿음의 계대를 이루게 하여
“땅의 모든 족속”의 충만함을 암시하기까지 한다.
그 가득 찬 하나님 나라 백성과 “함께” 하는 것이 성도의 삶이요 죽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