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9:1-12, 중간결산)

야곱이 십칠 년 동안 애굽에서 마지막 인생을 살았던 것은 참으로 놀라운 축복의 세월이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 그가 열두 아들 모두와 함께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이나 베냐민에 보였던 그의 특별한 사랑과 감정을 보면
야곱은 매우 섬세한 감각의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제는 그의 충만한 감사와 사랑과 기쁨을 마음껏 펼쳐도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기간에 누린 복으로 모든 것을 미화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의 인생 147년 가운데 17년은 매우 짧은 기간이다.
그가 이제 죽기 전에 열두 아들을 생각하며 그들 각자에 대한 유언을 하게 될 때
그는 아들들의 인생 전체를 회상한다.
그는 죽을 때가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모든 것을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뭉뚱그리지 않는다.
이 순간 그는 굉장히 예리한 지각과 판단으로 아들들의 생에 대해 판단하며 각각에 맞는 권고를 한다.

야곱의 축복과 저주가 정확한 사실, 즉 아들들이 각각 살아온 바에 정확하게 기초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것이 열두 명에 대한 최종선고가 내려지는 자리는 아니다.
그러나 각 아들은 무엇보다 자신의 진실에 대면하는 매우 귀중한 시간을 갖는다.
아들들에게 아버지는 제3자이면서 그들을 가장 사랑하는 자다.
이 말들은 각 아들들이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라는 제3자가 보고 생각한 것을 말하는 보다 객관적인 진술이다.
나 자신에 대한 객관적인 판단을 들을 수 있는 것은 분명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나를 위해 참으로 귀중한 시간이다.
그 기회가 없다면 나는 나 자신의 오로지 주관적인 긍정이나 부정에 의해
오만해지거나 자학에 빠질 수 있다.

야곱은 장자인 르우벤의 간음죄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시므온과 레위의 폭력죄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 아들들이 그것을 객관적으로 듣고 그 사실에 늘 대면해야 한다.
유다의 경우는 아마도 요셉과 관련하여 열 명 가운데 가장 나은 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결코 요셉의 유기와 매매 및 실종을 막지는 못했지만 마지막에 보인 그의 대속적 책임감은 참으로 중요했다.

야곱이 각 아들에게 말하는 “축복”과 “저주”는 최종적 선언이 아니다.
이것은 그들이 살아온 바에 대한 현재의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야곱은 곧 죽겠지만 열두 아들은 그보다 더 오래 살 것이므로,
그러므로 야곱의 축복과 저주는 이 아들들에게 ‘중간평가’, ‘중간결산’의 매우 귀중한 자리가 된다.
중간평가를 제대로 하는 자는 지금까지의 실책을 만회할 수 있고,
그것을 잘 못하는 자는 지금까지의 복된 상황을 망치거나 그보다 더 큰 저주의 상황에 빠질 수 있다.
야곱이 “너희가 후일에 당할 일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리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변개될 수 있으며, 또한 그대로 실행될 수도 있다.
저주의 말을 듣고 회개하며 고친다면 그 말은 축복이 될 것이다.
그 반대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가령 오늘 본문의 첫 네 아들의 경우,
유다에 대한 축복은 이 지파가 열둘 가운데 가장 강대하고
신앙적으로도 모범적인 인물들이 배출되고 ─열두 명의 가나안 정탐꾼 가운데 갈렙이 유다 지파에 속한다─
무엇보다도 다윗 이후 정말로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가 계속 나온 것과
궁극적으로 세상을 구원하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지파의 후손으로 오시는 것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디나 사건 이후로 시므온과 레위가 칼로 세겜 사람들을 보복하여 야곱에게서 혹독한 “저주”를 받았지만,
출애굽이 바로 레위의 자손 모세를 통해 이루어지고
이 지파가 레위 지파로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 역할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야곱의 저주에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축복의 결과였다.
그러므로 야곱이 아들들에게 하는 각각의 말은 전적으로 그들 삶의 객관적인 사실에 근거한 내용이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그들의 삶이 결정되는 것은 아니며,
이들은 이 말씀에 대면하여 자신의 진실을 목도하고 참으로 하나님께 더욱 나아가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바로 중간결산이요 중간평가다.
중간평가를 잘하는 자가 그 이후의 삶에서 복된 자로 귀결되지 않겠는가.
아버지의 역할은 하나님께 감화되어 자녀들의 중간결산을 참으로 잘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