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44:18-34, 제가 대신하게 하소서)

열 형제가 애굽의 “총리” 앞에서 “진실을 증명할” “시험”은 사실 이미 끝났다고 봐야 한다.
그 “진실”과 “시험”의 핵심은 이들이 정탐꾼인지 아닌지의 여부에 있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말한 대로 과연 “한 사람의 아들들”임을,
특히 처음에 동행하지 않았던 “막내아우”를 대동함으로써 증명해야 했다.
그리고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막내아우”를 데리고 옴으로써 그 “진실”은 “증명”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사실 애굽 총리가 아니라 그들의 동생,
22년 전에 그들이 살해와 방불한 방기를 하였던 “요셉” 앞에서 이 “진실”의 “시험”을 받고 있다.
총리에게는 형제 관계만 입증되면 되겠지만,
요셉 앞에서는, 형제 관계가 깨졌던 그 요셉 앞에서는 이들의 형제 관계가 과연 “진실”한지가 관건이다.
이들은 과연 형제인가?
형제라는 사실은 열한 명의 등장으로
─오늘날 식으로 한다면 서류상으로 호적초본이나, 생물학적인 입증까지 간다면 유전자검사로─ 증명될 것이다.
그러나 요셉이 묻는 “진실”의 차원에서는 이들의 형제 됨이 문제다.
22년 전 이들은 “한 사람의 아들들”로서 한 형제가 아니었다.
지금도 그러한가?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 재현될 때에 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것이 곧 이들의 “진실”이다.

어제 본문에서 베냐민의 자루에서 총리의 “은잔”이 발견되어 그가 범죄자로 체포되는 상황에 있었다.
이때 형제들이 오열했고,
유다가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라고 고백했다.
유다는 베냐민과 나머지 형제들이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들은 22년 전과 달랐다.
이제는 배다른 막내아우, 아버지의 편애를 받는 베냐민─요셉─을 결코 내치지 않는다.

유다는 이것으로 부족했다.
그는 총리“에게 가까이 가서” 더욱 간청했다.
그리고 그것이 그의 말의 핵심이었다.
그는 베냐민과 나머지 열 명의 분리불가능성을 넘어서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시종 요셉과 자신들을 “주”와 “종”으로 꼬박꼬박 칭했다.
심지어는 그들의 아버지 야곱도 “주의 종 우리 아버지”라고 함으로,
자신들뿐 아니라 아버지도 총리의 “종”인 것을 강조했다.
아, 이로써 요셉의 어린 시절 꿈은 형들을 통해 다 이루어졌다.
아버지도 요셉의 종이다!
요셉 앞에 “땅에 엎드려 절”할 자라고 시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유다의 “진실”이 토설된다.
그는 자세히 경위를 설명하면서 베냐민이 애굽에 남을 수 없는 이유를 제시한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있어야 하므로 가나안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가 범죄자라 하더라도 그는 아버지와 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와 이 잔이 발견된 자가 다 내주의 노예가 되겠나이다”라는 공동의 연대에서
“막내아우”는 제외되어야 한다.
베냐민은 설령 죄를 지었다하더라도 그는 면책되어야 한다.
그 책임은 총리의 은잔을 훔치지 않은 것이 분명한 유다, 자신이 대신 지겠다.
베냐민과 나머지 형제는 다 집으로 돌아가고
자신만 그 죄의 대가를 지게 해달라고 그는 간곡히 애절하게 부탁한다.
“이제 주의 종으로 그 아이를 대신하여 머물러 있어 내 주의 종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는 그의 형제들과 함께 올려 보내소서”
나머지 형제들은 모두 “그 아이”, 곧 “그의 형제들”이다.
이들은 분리되면 안 된다.
나 혼자만 분리될 수 있다.
아! 22년 전의 상황으로 돌아간다면,
유다는 요셉을 나머지 아홉과 함께 집으로, 아버지께 돌아가게 하고,
자신이 애굽에 팔리겠다고, 그 결과가 죽음이라 할지라고 자신 혼자만 그 일을 당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가나안에서 아버지를 설득할 때 유다는 베냐민의 동행을 허락해야 가족 모두가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다 살고 나는 죽으리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내가 죽어야 다 산다’는 것이다.
지금의 상황은 너무도 절박하여 모두 다 살 수 없다.
베냐민이 죽게 되었다.
그것을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이 일을 위해 자신은 이미 아버지께 한 약속이 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약속을 지켜 베냐민을 구해야 한다.

만일 베냐민이 살아 돌아가지 못하면 유다는 아버지에게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라고 강조했었다.
그는 이제도 총리 앞에서 자신이 “영영히 아버지께 죄짐을 지”게 될 것을 말한다.
그는 그 ‘영원한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지금 죽는 길을 택한다.
아, 그는 아직 모르지만,
예수께서 이루실 대속과 성도가 죄에 대해 죽으므로 의에 대해 사는 진리를 모두 암시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사실 “다 살고 죽지 아니”할 진리가 있음으로 예시하고 있다.
이로써만 요셉 앞에서 ─총리 앞이 아니라─ 입증될 “진실을 증명”하는 일을
유다가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