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7:1-14, 견고한 성읍)

이사야 선지자가 사역하던 시기에 발발했던 문제는
아람(다메섹)과 북이스라엘(에브라임)의 동맹이었다.
앗수르나 바벨론이나 블레셋, 모압에 대한 심판의 예언은 모두 이 사건의 귀결이었다.
당시 역사에서 사건의 발단은 바로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동맹이었다.
앗수르에 맞서 이들은 동맹하였고 나아가서 유다를 침략했다.
오로지 국제적인, 특히 군사적인 관계로써만 역사를 주도하겠다는 생각은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배제하는 자기 우상화 작업이다.
사실 세상은 ─모든 나라가, 모든 사람이─ 역사를 그렇게 생각하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역사를 주도할 힘을 키우는 데만 광분한다.
그리하여 누구나 강자가, 강대국이 되려 하고 또는 자기에게 유리한 동맹으로써 그 힘을 구축한다.

그러나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신다.
현재 최강국인 앗수르도, 장차 앗수르를 무너뜨릴 바벨론도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거늘
하물며 아람, 북이스라엘은 어떠하랴.
아람보다 더 주목이 되는 것은 북이스라엘에 대한 경고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부르셨던 이스라엘이었다.
야곱이었다.
그들은 앗수르나 바벨론이나 아람과 달리 하나님께 율법을 배웠고 하나님의 특별한 인도를 받았다.
하나님의 은혜로 출애굽 구원을 경험한 나라다.
그리고 그것은 이들을 통해 열방과 온 세상의 민족들을 하나님께로 이끄시기 위한 뜻에 의한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고,
그리고 만민에게 그 모범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사명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는 대부분 그 반대의 길을 걸었다.
이스라엘은 더구나 북과 남왕조로 분단되어 특히 북이스라엘이 더욱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다.
그리고 이제 그 결과가 나타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복 있는 사람”의 길이 아니라
“악인들의 꾀를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은 자의 길이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는, 즉 “망하”는 길로 간 것이다.
이것이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끊임없는 말씀과 경고와 채찍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게 나아간 길이다.

그것은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지 아니한” 자가 겪을 마땅한 벌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기뻐하는 나무를 심으며 이방의 나무 가지도 이종하는” 자였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포도원에서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어
가장 귀한 열매를 맺었어야 할 그들이었다.
그러나 이방의 우상에 기웃거리고 그것들을 신으로 섬겼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이제라도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뵈올 가능성이 있었다.
회개하면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자기 길로 계속 나아갔다.

이방의 모든 나라와 같이 북이스라엘도 ─결국에는 남유다도─
“견고한 성읍들”을 세우기 위해 자기 힘을 키우고, 부족하면 동맹에 의지한다.
성읍의 견고함은 어디서 나오는가?
군사력과 경제력에서 나오는가?
앗수르와 바벨론과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성읍들이 무너지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들이 전쟁에서 패망하고 성읍이 무너지고 결국 황폐하게 되는 것은
“능력의 반석”에서 떠났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하나님께서 버리셨기 때문이다.
군사력과 경제력은 혹 얼마간 작동하는 것으로 보이고,
그래서 그것에 그토록 의존하려고 한다.
그러나 성읍의 진정한 견고함은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있는 견고함에 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을 막아낼 수 있는 성벽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실 성읍이냐가 중요하다.
즉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않으며,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두”는 백성은
하나님께 심판을 받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면 망한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지 않으시면 견고하게 남는다.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의인들이 심판을 견디는 특별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견고함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것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