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1:1-16, 온 세상의 구세주)

앞에서 여러 번 강조된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은
아람과 북이스라엘, 그리고 앗수르의 침공에도 끝까지 “여호와를 진실하게 의지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께로 돌아올” 자들이다.
그것은 그들이 전쟁에서 화를 당하지 않고 잡히지 않고 살아남는다는 뜻은 아니다.
유다의 멸망 때에 더욱 분명해질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과 포로까지 내다본다면
약속된 “남은 자”들도 전쟁의 패망을 겪었고 예루살렘에서 쫓겨났고 이역만리 바벨론까지 끌려간다.
“남은 자”란 유다와 예루살렘이 망해도 그 땅 어딘가에 용케 남아 있을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루살렘에는 믿음을 지키지 못한 주변인들이 남게 된다.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자들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고
거기서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며 하나님의 명령대로 바벨론을 위해서 일했다.
물론 또한 “남은 자”란 가장 오래 사는 자, 이 땅에서 오래도록 죽지 않고 살아남는 자를 뜻하지 않는다.
어디서나 믿음을 지킨 자는 유다에서 죽든지, 바벨론 포로생활 중에 죽든지,
하나님의 은혜로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살다가 죽든지,
그가 어디서 살고 죽는지가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온 자요 “남은 자”다.
“산 자의 하나님”이시요, “부활이요 생명”이신 주님께는 산 자와 죽은 자가 똑같다!
그러나 믿음 있는 자와 믿음 없는 자는 다르다.
하나님께는 그 구분만 있다!
이것이 “남은 자”와 남지 못한 자의 구분이다.

이 “남은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구원을 예비하신다.
바로 이들을 위해 구세주가 오신다.
그는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이며, “그 뿌리에서” 난 “한 가지”다.
그리고 그 “싹”과 “가지”에서 바로 “남은 자”가 “결실”될 것이다.
구세주 위에 “여호와의 영”, 곧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임하여 그 “영”으로 세상을 구원하고 다스린다.
그는 지금까지의 세상 통치자와 전적으로 달리 “공의”와 “정직”으로 세상을 판단하며 심판한다.
가난한 자, 겸손한 자가 그 외적 조건 때문에 어떤 불평등한 판단과 심판을 받지 않는다.
이사야 선지자가 그의 시대에 계속 외친 유다의 패역한 상황과 정반대의 세상이 될 것이다.

그때 구원받는 자의 범위는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사실은 이것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의 범위다!
그것은 유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에브라임(북이스라엘)도 그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때 구세주께 돌아오는 자는 “열방”이다!
물론 이것은 마지막에 누구나 다 구원(보편구원)된다는 뜻은 아니다.
구원은 다른 한편 심판이기도 하다!
“남은 자” 외에는 심판을 받는다.
그런데 그 “남은 자”가 혈통 상 유대인, 이스라엘 민족만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구세주는 “만민의 기치로 설 것”(=“온 백성의 구원의 깃발로 세워질 것”)이며,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온다.
먼저 믿었던 유다와 이스라엘뿐 아니라 나중에 믿게 될 모든 열방의 민족들이
‘끝까지 믿음을 지켜’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다.

아마도 이사야의 이 예언을 아직은 다 이해하지 못할 유다 백성들과 달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아주 잘 안다.
초대 교회의 역사에서 그 “열방”, “만민”이 어디까지 이르는지 우리는 안다.
지금, 이 세상에서 누구까지 예수를 믿고 “남은 자”로서 하나님께 돌아오는지를 우리는 잘 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사람을 넘어선다!
구세주의 구원은 만물에 이른다!
죽음과 투쟁이 ‘자연적 본성’이 되어버린 이 세상의 모든 생태계, 짐승들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 ‘죽음과 투쟁’으로부터 해방되고 구원된다.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다.
이것이 주께서 이루시는 구원이다!
여기에 “남은 자”들이 참여한다.
그들은 바로 “여호와를 아는 지식”을 가진 자, 끝까지 믿음을 지킨 자다.

아, 하나님께서 이 우주의 구원과 회복과 영광을 북이스라엘이 망하고 유다도 휘청거리는 때에,
영적으로 패역하여 절망뿐인 때에 확실한 약속으로 주셨다.
오늘날 어디를 봐도 이사야의 시대와 같을 것이 뻔한 비관적이고 두려울 상황에서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싹”, “그 뿌리에서” 나오는 “한 가지”가 “결실할 것”을 우리는 기다릴 수 있다.
우리는 믿음을 끝까지 견지할 수 있다.
아, 이 일이 나의 의지로서는 불가능하며 얼마나 힘들지 안다.
믿음을 지키는 것이 북한과 중동의 나라들에서는 극한적으로 어렵지만,
미국과 유럽과 우리나라에서도 진실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로 살기가 결코 쉽지 않다.
‘앗수르를 의지’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반기독교적이며 세속적인 체제와 신념과 법과 제도가, 돈의 위력이 믿는 자들을 더욱 소수로 내몬다.
그러나 그 소수를 “남은 자”로 남게 하시는,
연약한 우리를 끝까지 남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남기를 원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