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8:1-8, 앗수르의 위력)

북이스라엘과 아람 동맹군의 침공은 유다의 생사가 걸린 위협처럼 보였다.
아하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가 살아남기 위해 생각한 것은 무엇인가?
그는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그의 앞에 두 동맹국 왕들의 심리전술적 위협이 있었고,
그와 정반대를 내용으로 하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있었다.
어려운 사태이지만 선택할 여지가 있었고 더구나 너무도 쉬운 양자택일이었다.
침공의 위협과 그것을 물리쳐 주시겠다는 구원의 약속.
그리고 그 출처는 각각 두 왕과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 쉬운 문제를 아하스는 어렵게 풀었다.
엉뚱하게 대답했다.
완전히 틀린 답을 썼다.
그는 앗수르 왕을 택했다.
강대국 앗수르가 아람과 북이스라엘을 막아줄 것이다!
아하스는 원군을 요청했다.

하나님은 이에 대한 두 징조를 보여주신다.
처녀가 낳을 아들, 곧 임마누엘은 그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는 징조였다.
이 사실은 심지어 두 번째 징조, 곧 이사야가 낳을 아들, “마할살렐하스바스”를 통해 더욱 확증된다.
“다메섹의 재물과 사마리아의 노략물이 앗수르 왕 앞에 옮겨질 것임이라”

그러나 하나님은 두 나라에 대한 유다의 승리만 징조와 말씀으로 확증하신 것이 아니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유다가 의지한 앗수르에 대한 징조와 말씀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아하스에게 하나님 말씀을 전한다.
지금까지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하나님께서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버지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이 오는 날이니라”

“앗수르 왕이 오는 날”은 무엇인가?
아하스가 그토록 바라던 원군 앗수르의 ‘왕림’인가?
아마도 앗수르에 의해 아람과 북이스라엘이 노략당하는 것을 보고
아하스는 바로 그가 바라던 일이 벌어지는 것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아니다.
결코 아니다.
아하스는 그것을 기대하였지만 “앗수르 왕이 오는 날”에 일어날 일은 그것만이 아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일어난다.
바로 앗수르가 유다를 칠 것이다.
“흉용하고 창일한 큰 하수” 유브라데 강,
“곧 앗수르 왕과 그의 모든 위력으로 그들을 뒤덮을 것이라”!
그 “위력”이 얼마나 되는지 어마어마하다.
유다 전체가 그 “위력”에 눌린다.
“그 모든 골짜기에 차고 모든 언덕에 넘쳐흘러 유다에 들어와서 가득하여 목에까지 미치리라”
앗수르의 큰 강이 유다를 뒤덮어 모든 백성을 목에까지 잠기게 한다!

하나님께서 이사야를 통해 거듭, 자세히 경고하시는 것은 앗수르를 의지하는 것의 문제다.
그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다.
그 결과는 결코 유다의 해방이나 구원이 아니다.
그 반대다.
유다가 의존한 앗수르의 “위력”에 의해 유다가 심판을 당한다.
하나님께서 유다가 의지한 앗수르를 통해 유다를 징계하신다!
앗수르의 “위력”이란 곧 유다의 죄의 “위력”일 뿐이다.
그것은 조금도 선을 이루지 못한다.
어떤 평화도 복도 번영도 안전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것으로는 결코 구원을 얻지 못한다.
죄의 “위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사람들 괴롭히는 것밖에, 지구생태계를 어지럽히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자신이 망하는 것밖에 없지 않은가?
그것이 앗수르의 “위력”이다.
그것을 의지하다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징조를 주시고 약속하셨는데도 앗수르를 의지하다니,
“그의 모든 위력”을 구세주처럼 기대하다니!
앗수르의 “위력”을 의지하는 자는 바로 앗수르의 “위력”으로 망한다!

─마지막 구절의 “임마누엘이여 그가 펴는 날개가 네 땅에 가득하리라”는 말씀의 번역이 서로 다른 것으로 나타난다.
‘앗수르의 군대가 새처럼 날개를 펴서 유다 온 나라를 뒤덮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
또는 같은 뜻으로 ‘하나님께서 날개를 펴셔서 이 땅을 보호하신다.’
그 반대로 ‘아, 임마누엘아, 그(앗수르)가 날개를 펴서 네 땅을 온통 덮으리라.’
하나는 임마누엘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위력을 막아내시고 보호하실 것으로,
다른 하나는 앗수르의 위력이 유다를 뒤덮을 것으로.
원어가 양쪽의 해석의 가능성을 다 가지고 있다면,
문맥상으로는 후자가 더 적합한 뜻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