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35-49,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며)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의 마지막 부분에서 부활을 설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사실 이것이 이 교회의 현실적인 문제들─분쟁, 음행, 소송, 질서 등─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이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일” 곧 부활이다.

이것은 오감으로 인지할 수 있는 자연적인 일이 아니므로 사람들이 이해하지도 믿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영적인 환상으로 예수의 부활을 일으키시거나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실제 몸에서 일어난 일로 행하시고 사람들의 눈과 손으로 지각할 수 있게 하셨다.
초자연적인 일을 자연적으로 확증하셨다.
우선은 부활의 많은 목격자가 있었고 바울도 그 가운데 하나다.

또한 이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이치였다.
그리하여 바울은 이것을 눈으로 보지 못해도 충분히 이해하고 믿을 수 있도록 설명하는데
바로 씨앗을 통한 비유다.
씨앗에서 생물 개체가 나오는 현상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과 똑같은 일은 아니지만
자연세계에서 부활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씨앗과 생물의 개체는 모양도 형질도 전혀 다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땅속에 묻혀서 사람이 보지 못하는 동안에 어마어마한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
씨앗과 생물은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그러한 차원을 뛰어넘는 변형은 참으로 신비로운 현상이다.
부활은 그 이상의 사건이지만 이 자연적인 현상의 신비를 이해한다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초자연적 사건을 얼마든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부활 사건을 행하시며,
동일한 창조주의 역사이므로 이 두 사건은 상당히 유사성을 갖는다.

씨앗이 식물 개체로 될 때에 놀라운 것은
씨앗에서는 전혀 볼 수도 없고 예상할 수도 없는 형체가 나온다는 것이다.
그것은 엄청난 도약이요 비약이다.
부활은 자연을 뛰어넘어 초자연으로 일어난다.
어쩌면 그것은 모양은 같아도 질적으로 완전히 달라지는 변형이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
나의 현재 육체는 시간에 따라 노쇠하며 병원균에 의해 병약해질 것이며 종내 죽음을 맞이하고 흙으로 돌아간다.
썩는다.
그러나 부활을 통해 나의 몸이 썩지 않는 몸으로 변형될 것이다.
그때 나의 모습은 지금의 모습과 같아서 내가 나를 알아보고
다른 사람도 나를 알아볼 같은 외형이겠지만 그 질이 완전히 다르다.
다시는 죽지 않는다.
영원히 산다.
이제는 썩지 않는 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영광스러운 몸이다.
영광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바의 그 상태다!
아, 지금의 나와 얼마나 다를 것인가!

부활은 육체가 영혼으로 된다는 뜻이 아니다.
아담의 죄 이후로 죽고 썩도록 변질된 몸이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형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어 하나님과 화합한 아름다운 영혼이,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몸과 결합할 것이다.
바울은 이 몸을 “신령한 몸”, “영의 몸”이라고 칭한다.
영혼과 같은 무형질이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몸이라는 뜻이다.
성령의 뜻대로 사는 몸.
이것이 신령한 몸이요 영의 몸이다.

이 변화는 바로 죽음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내가 예수를 믿을 때 나의 피부 감각이 성스러워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탐욕을 절제하고 거룩한 소원을 좇아야 한다는 변화된 지식을 갖게 될 것이지만
나의 몸은 탐욕에 대해 여전히 반응하고 나의 의지는 여전히 그 편을 든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나는 내 의지와 몸을 성령의 뜻에 길들이는 훈련을 부단히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기쁘게 도우신다.
그러나 나의 몸 자체에는 병들고 늙어 죽는 자연적 유전자가 그대로 남아있듯이
죄성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것은 죽어야 ─씨앗이 심겨지듯이, 즉 씨앗이 죽듯이─ 새 몸으로, “신령한 몸”, “영의 몸”으로 변형된다.
부활이다!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몸이다.
이것이 진정한 생명이다.

나는 오로지 나의 한계 앞에 겸손하며,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롭고 영광스러운 역사만을 오로지 바라고 의지하며 소망 중에 산다!
부활을 소망하며 이 땅에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