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5:20-34, 부활하는 자의 삶과 죽음)

어제 본문에서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라는 말씀은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전제(와 근거가)되어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 반대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과 같은 사건으로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예수의 부활은 ‘소생’과 달랐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전제(와 근거가)되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벌어질 것이다.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바로 이것을 위해서였다.

오늘 본문은 더욱 이해하기 쉽게 그 “차례”를 명확히 밝혔다.
부활을 말할 때 “첫 열매”는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고
그 “다음” 열매는 주께서 다시 오실 때 모든 성도에게 일어날 부활,
즉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다.
이것은 단지 예수가 1번, 우리가 2번이라는 시간적 순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께서 부활을 ‘제정’하셨다.
예수 이전에 부활이 먼저 있지 않았다.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부활이 존재했다.
부활이라는 현상이 먼저 있었고 그 일이 예수에게 제일 먼저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던 부활을 예수께서 ‘창조’하셨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것을 우리에게도 이루신다.
모든 “죽은 자”에게 예수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에게만 그리스도와 똑같이 “다시 살아나는 일”이 일어날 것이다.
그 부활은 영원한 생명이요 영광스러운 생명이다.
영원히 지옥에서 사는 것도 시간적으로는 영원이겠으나
그것은 영광의 반대인 형벌이다.
부활은 영원하며 영광스러운 생명이다.

성도의 부활은 예수께서 “강림하실 때”에 일어난다.
그러나 그 이전의 시간 모두가 다 그와 연결된다.
왜냐하면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일”이요 그것이 영원하고 영광스러우므로
그 부활 사건 이전의 모든 시간도 영원하며 영광스러움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것을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단언”으로 설명한다.
부활, 곧 “다시 살아나는 일”은 죽음이 전제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었고 “다시 살아나신 일”이 일어났다.
모든 사람이 다 죽고 그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는 일”이 일어난다.
즉 죽음은 끝이 아니라 부활의 시작이다.
죽음 뒤에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부활하는 성도의 삶은 이 부활을 위해 죽는 삶이다.
죽음을 면하기 위해 죄와 치욕을 마다하지 않는 일은 성도에게 없다.
성도에게 죽음은 부활로 가는 길이다.

바울 사도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말을 더 구체적으로 풀어서 설명했다.
“사람의 방법으로 ···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는 “맹수” 곧 ‘극심한 고난’에 “사람의 방법”으로 맞서지 않았다.
그는 죽음과도 같은 고통스러운 일을 면하기 위해 “사람의 방법으로” 싸우지 않았다.
악을 악으로 ─비난을 비난으로, 모함을 모함으로, 폭력을 폭력으로─ 갚지 않았다.
이기는 것이 목적이지 않았다.
기꺼이 당했다.
기꺼이 져줬다!
성도의 인생은 “사람의 방법으로” 이겨서 살아남는 것이 승리인 경기가 아닌 것을 바울은 알았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것이 바로 그것 아닌가!
예수님은 “사람의 방법으로” 싸우지 않으셨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즉 공회와 빌라도의 법정을 보기 좋게 이기기 위해
하나님께 “열두 군단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도록 요청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바울은 날마다 죽는 것이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않는 “선한 행실”이라고 강조한다.
성도가 “선한 행실”과 “죄” 가운데 무엇을 택할지는 너무도 분명하다.
그러나 세상의 현실은 결코 이상적이지 않다.
성도가 마주대하는 현실은 “선한 행실”을 행하면 죽고, “죄”를 택하면 사는 세상이다.
그리하여 바울은 망설임 없이, 기꺼이 죽음을 택한다.
“날마다 죽노라”는 단언은 “선한 행실”을 택하고 “죄”를 거부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는 죽는 것이 오히려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삶이다.
아, 나의 삶은 부활에 맞지 않게 너무도 구차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