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6:14-19, 알아듣기 쉬운 말로)

성령의 은사를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시는 목적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다.
이 유익은 “덕”으로도 바꿔 표현할 수 있는데
그것은 또한 자신에게 유익(덕)이 되는 것과 교회 공동체에 유익(덕)이 되는 것으로 구분된다.
각 사람의 성령의 은사를 “여러 지체”로 교회를 “한 몸”으로 비유할 때에
성령의 은사를 통한 유익은 당연히 교회 공동체적 유익과 직결된다.

이러한 점에서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방언과 예언을 비교하며
유익의 의미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방언은 그때나 오늘이나 정의가 분명한 현상이다.
그러나 예언은 여러 가지로 이해되는 것 같다.
성경의 계시와 같은 의미,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
설교와 가르침,
‘하나님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떠오르게 하시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다.
그러나 두 은사의 분명한 차이는
방언은 통역이 없이는 알아들을 수 없는 음성이며,
예언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설명된 이야기라는 데 있다.
예언은 혹 내용에 따라 이해에 난이도가 높고 낮을 수는 있겠으나
그 말 자체는 다 알아듣는 그 시대의 일상 언어로 소통된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이 차이를 중요하게 살핀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서로의 소통이다.
그리고 그것이 공동체적 유익이다.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말로써는 유익을 얻을 수 없다.
그렇다면 방언과 예언이라는 두 은사 자체보다, 유익의 속성의 비교가 더 중요할 것이다.
한 마디로 상호이해, 즉 의사소통의 중요성이다.

왜냐하면 방언이 아니더라도 “알아듣기 쉬운 말”이 아닌 말이 얼마든지 난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분명히 지금 현재의 언어로 하는 말인데도
듣는 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그렇다면 그것은 유익이 되지 못하는 말이 된다.
어느 경우가 그러한가?
본문에 직접 나온 예로 “외국인”의 말이 그러하다.
‘외국어’는 “외국인”이나 그것을 특별하게 교육받은 자만 알 수 있는 언어다.
오늘날 교회에서 외국어로 설교나 기도를 하거나 대화를 하는 자는 없을 것이지만,
외래어 및 외국 단어의 남용은 너무 흔한 것이 되어버렸다.
듣는 이 가운데는 그런 단어에 익숙하지 않은 특수 연령 및 계층의 사람들이 있다.
외래어와 외국 단어의 남용은 교회 전체적인 의사소통에 부적합한 말이다.
심지어 그것은 대부분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도구로 되기가 일쑤다.
말하는 자는 정말로 “알아듣기 쉬운 말”로써만 이룰 “유익”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마치 하나님께서 영어로 성경을 쓰시기나 한 것처럼 ─영어가 성경 원어인 듯─
말하는 경우가 교회(특히 설교)에 넘친다!
이것은 본문에서 말하는 “사람에게 말하며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위로하는” “예언”에 해당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유익 없이 “자기의 덕을 세우”기만 할 “방언”에 가깝다.
외국 단어가 아닌 우리나라 말이라도 듣는 이를 고려하지 않은 말은
여전히 의사소통에 부적합하다.
학자 흉내를 내면서 지식을 자랑하는 것,
자기 자랑이 상당히 많이 포함되는 많은 간증들,
이러한 것도 유익과 덕을 세우는 말이 되기 어렵다.

14장의 내용은 13장의 내용과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
“사랑”을 특별히 언어생활에 적용할 때 14장이 나올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는 “알아듣기 쉬운 말”로써 세우는 “덕”과 유익이란
온유하며 자랑하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하지 않은 말이 아니겠는가.
나의 언어생활에 “사랑이 없으면”
혼자 떠드는 소리에 불과하고 아무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하며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나의 말에 얼마나 조심하고 돌아봐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