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2:1-21, 어찌 아니하시나이까)

다윗은 환난을 참 많이 당한 사람이다.
그의 시, 그리고 시편의 많은 시가 탄식의 시다.
성도가 세상에서 살 때에 탄식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근본적으로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통회하는 탄식을 하며,
또한 어둠의 세상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성도를 핍박함으로 고난 가운데 탄식한다.

다윗은 환난의 상황에서 여러 가지를 생각한다.
가장 먼저는 현재의 고통이다.
그것은 몸으로 심령으로 겪는 괴로움일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지 의문도 포함한다.
그리하여 다윗의 절규는 이것이다.
“어찌 ··· 아니하시나이까”
하나님은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셨다.
그의 신음 소리를 듣지 아니하셨고, 돕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으며 결국 그를 버리셨다.
다윗은 그의 심신의 고통보다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에 더욱 괴롭다.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보이는) 상황은 현재다.
‘아니하셨나이까’가 아니라 “아니하시나이까”다.
인간의 실존에서 현재가 가장 현실적이다.
현재의 고통과 괴로움이 가장 큰 문제다.
다윗은 그것을 솔직하게 아뢰며 고민한다.

그러나 그는 곧 과거를 되돌아본다.
그는 지금과 같은 환난의 상황이 전에도, 조상 때에도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는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그들을 건지셨으며 구원하셨음을 기억해낸다.
그러나 그것은 남의 기억이 아니다.
옛날에 언젠가 조상들에게는 그러했었다는, 나와는 상관없는 사실인가?
아니다.
다윗은 바로 자신에게도 있었던 일들을 기억한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서 그를 어떻게 도우셨는지, 그의 하나님이셨는지를 고백한다.
시편 139편에서는 그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밀하고 기이하고 기묘하신 권능으로 만들어졌는지,
조성되었는지를 노래한다.
나의 첫 과거부터 하나님은 나를 아셨고 인도하셨다.

또한 그의 현재의 고난에 직면하여 그는 과연 자신이 누구인가를 대면한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이것이 그의 고백이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경멸되고 있다는 뜻뿐 아니라,
자신이 보아도 그러함을 고백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부인하고 간과하지만 성도는 그 사실을 분명히 안다.
‘나는 죄인이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다!

그리하여 그는 미래를 본다.
그 미래는 우선은 간구에 해당된다.
현재가 고난의 상황이므로 여기서 구원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렇게 자동적이지 않다.
많은 사람이 현재의 환난에 직면하여 좌절하고 원망하고 불평한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나는 경우도 참 많다.
그러나 성도는 간구하는 자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다.
하나님을 간절히 의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미 과거에 고난 중의 성도를 구원하신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일이 없었다면 이러한 간구는 그저 막연한 기대요 요행과 우연을 바라는 것뿐이다.
그러나 다윗의 기도는 그렇지 않다.
그는 엄연한 사실에 기반을 두고 기도한다.
하나님께서 조상들과 자신이 환난 가운데 있을 때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을 베푸셨다.
그 사실에 근거하여 하나님께서 다시금 은혜 베푸시기를 기도한다.
기도에 근거가 있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현재 이 순간에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시는 상황이다.
그러나 과거를 보면 환난과 구원이 동시적인 경우보다
─병에 들자마자 고쳐주시든지, 전쟁이 나자마자 이기게 되든지,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가 생기자마자 바로 해결되든지─
거의 다 그 사이에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시간 동안 뭔가 계획을 짜고 힘을 동원해서 겨우 이겨내셨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고난 가운데 성도의 작업에 시간이 걸린다.
이 일이 왜 일어났을까?
내가 돌이킬 죄가 무엇일까?
악인에 의한 것이라면 그들의 궤계는 무엇인가?
이전에 이러한 일이 있었는가?
그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가?
내가 지금 무엇을 하며,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등등.
그 가운데 나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고
지금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차근히 정립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것이다.
인간이기 때문에 시간이 걸린다.
즉 회상하는 과거란, 정확히 말하면 문제가 발생한 과거 1과
그것이 해결된 과거 2 모두가 포함되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 과거 1과 과거 2가 합해진 과거를 생각할 때
나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한다.
바로 이것으로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본다.
지금의 환난은 나중에 과거 1─현재로서는 지금─이 될 것이며
이제 하나님의 때에 베푸시는 구원은 과거 2─현재로서는 미래─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미래의 시각에서 보면 나의 지금 문제는
이미 ─미래의 시점에서 과거에─ 해결된 것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미래에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간구하지만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 나를 도우소서 ··· 건지시며 ··· 구하소서”)
그는 이미 “주께서 ··· 구원하셨나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옛날에 있었던 것의 회상이 아니라
앞으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기를 간구하는 중에 그가 내린 결론이요 고백이다.
하나님께서 나는 구원하셨다.
하나님께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 내게 구원을 행하셨다!
이것이 성도의 기도요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