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9:1-14, 하나님, 세상, 인간)

창세기 1장을 다윗이 다시 쓴 듯하다.
다윗의 시로 읽는 창세기 1장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
그것은 영광의 선포이며, 의로운 구원이다!

이미 창세기 첫 장에서도 창조의 순서가 중시되었고,
그것은 마지막 완성인 인간 창조로 귀결되었다.
다윗이 이 시에서도 창조를 크게 둘로 나누어 세상 만물과 인간을 구분하고
역시 후자에 중점을 두어 노래한다.

하나님께서 하늘, 궁창, 날, 밤, 땅, 세상, 해를 창조하셨다.
그 모든 것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었다.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한 이후 세상에서 거의 지배적인 사상은 자연의 신격화였다.
‘조물주’와 같은 단어로 마치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분하는 듯이 말을 하지만
사실은 자연 자체를 조물주로 여기는 것이 그 단어가 감춘 뜻이다.
자연이 곧 신이다.
자연이 모든 것이다.
모든 것이 자연에서 나왔다.
자연은 완전하고 조화롭고 관대하며 모든 것을 품는다.
죽음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요, 즉 자연의 품에 안기는 휴식이다.
자연은 자애로운 어머니와 같다.
이것은 하나님을 배격하는 우상화된 자연주의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거의 다 이런 사상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율법을 주셨다.
세상(자연)에 주지 않으셨던 의로운 법칙을 인간에게는 특별히 부여하셨다.
인간은 자연과 달리 “영혼”이 있으며 그것이 중심인 존재다.
그는 인격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의 율법을 깨달으며 의로움을 사모한다.
인간은 자연과 다르다.
물질적인,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당연히 많은 부분을 공유하지만 인간과 자연은 다르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고, 의로움이 요구된다.
그러나 자연주의는 하나님을 배격하는 의미에서 자연을 신격화하고,
다른 한편 인간과 자연의 구분을 없앤다.
인간은 어머니 자연이 낳은 자식이다.
그러니 인간은 곧 자연일 뿐이다.
인간에게는 자연을 넘어선 그 어떤 초월적인 의미도 목적도 없다.
느슨하고 뭐가 뭔지 모르게 막연하고 오로지 물질적이며 본능적이고 우연적이다.
인간은 자연보다 더 낫지 않다.
자연의 일부다.
이것은 인간의 고귀성을 부인하는 비도덕적 자연주의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그 어떤 근거로도 인간의 존엄성을 말할 수 없다.
도덕과 질서와 기준은 시대와 사회의 산물일 뿐이다.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다.

이러한 자연주의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진면모다.
자연주의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연의 영광,
인간의 의로움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상대주의를 주장한다.

그러나 성도는 이와 다르다.
천지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며 율법을 따라 의로움을 좇는다.
그리고 그러한 내가 결국 죄인임을 안다.
“자기 허물”과 “숨은 허물”과 “고의로” 지은 “죄”를 깨닫고
그것으로 인해 부끄러우며 슬프고 두렵다.
그리고 회개한다.
그러나 그러한 죄의 인식도 회개로도 그 죄를 해결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용서만이 죄인을 구원한다.
“구속자이신 여호와”의 은혜로써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
이 은혜를 입은 성도는 하나님의 의로운 말씀으로 돌아가
그것을 마음으로 묵상하며 순종한다.
그 의로운 말씀 속에 하나님을 경외하며, 사람을 사랑하며, 자연을 아름다워 하고 돌보는 지혜와 능력이 있다.
성도가 하나님께 열납되기를 바라는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의 내용이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