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15:1-5, 삶의 예배)

이 짧은 시는 간단한 질문과 역시 그렇게 길지 않은 대답의 단순한 구도로 지어졌다.

질문은 이것이다.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인가?
다른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이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 또는 더 포괄적으로 ‘성도’에 관한 질문이다.
“누구”인가는, ‘어떤 자’인가와 같은 뜻이며,
더 나아가서 ‘어떤 자여야 하는가’까지 내포한다.

나머지 네 절은 이 질문에 답한다.
정직한 행동, 공의의 실천, 진실한 말,
그리고 이웃에 대한 태도로 허물과 악행과 비방을 하지 않는 것,
망령된 자를 멸시하고, 성도를 존대하며, 하나님께 약속한 것을 갚고,
돈 없는 것을 약점으로 이용하지 않는 것, 즉 이자놀이와 뇌물의 거부다.

언뜻 “주의 장막”과 “주의 성산”으로 시작한 질문이
매우 종교적인 주제와 관련될 것 같다.
그러면 종교적인 경건에 해당될 답이 나와야 할 것이다.
예컨대 ─오늘날의 상황에서─ 주일성수, 십일조, 전도, 교회봉사, 묵상(말씀과 기도) 등등.
이러한 것은 성도들만 할 수 있는, 그리고 하고 있는 일들일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성도란 누구인가’라고 물을 때 나올 답일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이 시에서 매우 ‘종교적’인 듯한 질문을 던지고는
‘종교적 경건행위’로 생각되는 것들로 답하고 있지 않다.
그의 답은 모두 일상생활과 관련된다.
한 마디로 성도를 규정하는 본질이 ‘삶의 예배’라고 말한다.
그것은 24시간 내내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모든 내용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대로, 하나님을 위한 삶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는 감히 우리나라 교회가 이러한 ‘삶의 예배’를 간과하고
너무 교회에만 국한된 신앙을 강조해왔다고 비판하지만,
정작 나의 모습 자체가 결코 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나야말로 종교적이다.
나를 규정하는 특징은 무엇인가?
정말로 정직과 공의와 진실인가?
이웃사랑과 약자보호인가?
이것은 겨우 보통 ─어쩌면 그 이하?─ 수준이고,
기껏해야 교회와 관련하여서만 ‘경건성’이 몰두되고 있지 않은가?

물론 다윗이 여기서 말하는 내용들이 도덕과 윤리의 강조는 아니다.
도덕과 윤리의 기준과 내용은 사회에 따라 다르다.
대체로 상당히 긴 시간 동안 꽤 많은 사람들─공동체 집단─이 공유하기는 하지만
그 정도를 벗어나면 얼마든지 가변적이며,
현대사회에서는 그 범위 안에서도 아주 쉽게 바뀐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말씀은 ‘괜찮은 사회인’, ‘선량한 시민’의 덕목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와
하나님의 창조원리인 하나님의 형상대로 회복된 성도의 삶을 보여준다.
그것은 사회와 시대의 기준을 따르지 않는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따른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구별된 삶, 곧 거룩함의 구체적인 실천이 강조된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것은 무엇인가?
분명 교회를 다니지 않던 자가 교회에 출석하게 되고,
성경을 읽지 않던 자가 묵상하며 기도한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변화가 있는데,
바로 거짓말하고 불의하고 위선적이었던 인간 본성이 정직과 공의와 진실로 바뀌는 것이다.
경쟁적 이웃 대치가 사랑의 관계로, 약자의 이용과 멸시가 존대와 보호로 바뀐다.

아, 나는 교회와 관련된 부분은 변화를 말할 것이 있겠으나
─이른바 모태신앙으로서 극적인 변화의 과정을 거치지 않아
이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 않겠지만,
그러나 만일 믿지 않는 집에 태어나 나중에 믿게 되었다면
분명히 교회생활에서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나의 성품과 일상의 삶과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어떤 변화를 말할 수 있는가?
나는 성도로서 구별된 삶을 사는가?

만일 이 시의 질문과 대답을 ‘자기 판결’의 절차로서 읽는다면 나는 절망적이다.
이러이러한 자가 성도인데,
나는 그에 완벽하게 해당되지 않으므로 성도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그러나 또한 ‘목표’와 ‘과정’으로 읽는다면 나는 소망을 가질 것이다.
성도는 이러한 자이므로,
나도 그렇게 되도록 하나님께 간구하고 애를 써야(쓰고자)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성도가 아닌 자로 판결하기 위해 이 시를 주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를 더욱 성도답게 하기 위해 가르치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그것이 적당한 변명이나 나태의 구실이 되지 않도록
기만적 낙관이 아니라 오로지 겸손한 소망으로
하나님을 더욱 의지할 뿐이다.
나의 삶이 예배가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