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1:1-19, 주가 쓰시겠다)

예수께서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일,
이 장면을 읽을 때마다 ‘순종’의 의미를 생각한다.
그것은 미리 계획된 행사가 아니었으며 예약된 대여가 아니었다.
갈릴리에서 예루살렘까지 제자들과 함께 오신 예수님은 분명 걸어서 이동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다 와서는 굳이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겠다는 것이다.
그 뜻을 누가 알았을까!

제자들은 몰랐을 것이다.
만일 알았다면 먼저 말씀을 드렸을 것이다.
‘나귀 새끼를 타고 가셔야지요’
아무도 그렇게 말씀드리지 못했다.
그 말씀은 예수께서 하셨다.
‘맞은편 마을로 가서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
그것을 끌고 오는 방법도 말씀하셨는데,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런데 제자들은 이 말씀 그대로 행했다.
“맞은편 마을로” 가서 거리에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풀었고
사람들이 왜 그러느냐고 묻자 “주가 쓰시겠다”고 하니까 내어주어 그것을 끌고 왔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미리 주문해놓으신 것으로 알고 있었던 것인가?
제자들이 예수님과 계속 동행해왔는데 언제 그걸 하셨지? 하고 반문할 수도 있었을 텐데
제자들은 이 일을 조금도 거리낌 없이 행했다.
예수님 말씀에 대한 단순한 순종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보다 더욱 놀랍고 분명한 순종은 나귀 새끼의 주인에게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나의 상상인데, 나귀의 주인은 성경을 늘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는 나귀가 새끼를 낳았을 때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이 떠올랐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9:9)
그는 혹시 한 겸손한 “왕”께서 자신의 나귀 새끼를 타시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 그런 날이 오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할까, 사모하며
하나님의 이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그날 몇 사람이 오더니 자기 집 새끼 나귀를 풀어가는 것이다.
어쩐 일이냐고 묻자 그들은 “주가 쓰시겠다”고 한다.
아! 바로 그 순간이구나, 그는 직감했다.
이날을 위해 기도해오지 않았는가.
그는 단박에 겸손하신 왕이 오셨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예수께서 미리 나귀 주인에게 주문해놓으신 것인지,
성령께서 이 예언을 이루기 위해 그 순간 그의 마음을 감화하신 것인지,
아니면 나의 상상처럼 그 주인이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을 묵상하다가 소망이 생기고 기도해오다가 이 날을 맞았는지,
그 정확한 과정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그가 순종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성령의 감화에, 그가 알아들은 성경의 예언에.

물론 이 장면에서 순종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기록된 모든 약속들을 다 알고 계셨고
그것을 이루시기로 작정하셨다.
그것은 그 예언에, 그 약속에 순종하기로 작정하셨다는 뜻이다.
“왕”이 되는 일은 어쩌면 순종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이어서
욕심이나 야망과 더 어울릴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께서 순종하신 것은 “겸손”한 “왕”으로 오시는 일에 순종하신 것이다.
나귀도 아니고 나귀 새끼다.
예수님은 더욱 분명히 말씀하셨다.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
그것은 순전함을 상징하겠지만,
매우 어린 상태의 나귀인 것임도 의미한다.
그런 어리고 작은 새끼 나귀를 타고 오는 왕?
스가랴의 예언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우스꽝스러워 보일까.
이 예언을 모른다면 그저 ‘나귀 새끼를 타고 오는 자’일 것이고,
그건 더욱 우스운 일이다.
그 일을 예수께서 순종하셨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다음날 성전에 들어가셨다.
예수님은 성전의 정화도(말라기 3:1-4), 성전의 본질의 회복도(이사야 56:7,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을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
“기록된” 대로, 즉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순종하심으로 이루셨다.
“만민”은 누구인가?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
곧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56:6)이다.
성전은 유대인의 장터가 아니라,
만민,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이방인들,
하나님과 연합한 모든 사람들이 기도하는 집이다.
이제 이 약속과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오신 것이다.
만민을 위해 그 복되고 좋은 약속을 순종으로 이루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것이 자기 영광이나 욕심이나 야망이 아니라 순종인 것은,
예수께서 계속 말씀해 오신 바와 같이 그것이 고난의 십자가의 길이기 때문이다.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으시는 ‘대속’의 순종이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우리 주님이 하신 순종을 배울 때이다.
“주가 쓰시겠다”, 예, 쓰십시오, 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