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32-52, 예루살렘으로)

예수님은 드디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
그 길을 “앞에 서서” 가셨다.
이미 여러 번 말씀하셨고, 이제도 다시 말씀하신다.
왜 예루살렘에 가시려는지.
거기서 “당할 일”이 있다.
이번에도 긴 고난에 대한 말씀과 짧은 반전을 언급하셨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 “당할 일”이 무엇인지 아는 우리로서 제자들의 관심과 태도를 보면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음이 분명하다.
예수께서 고난에 대해 말씀하실 때 그들은 “영광”과 관심이 있고,
‘자리’에 집착하고 있다.

이들은 이미 예수께 훈계를 들었던 그 주제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누가 크냐”
야고보와 요한이 높은 자리를 구하자 나머지 제자들이 화를 낸다.
예수님의 심정에서 탄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 제자와 똑같은 마음으로 크기 다툼을 한다.
예수님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구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여리고에 이르렀을 때에 길가에서
예수께 부르짖은 맹인 거지 바디매오는 그와 달랐다.
그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바르게 알았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무엇을 구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았다.
“보기를 원하나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언하신다.

제자들은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구한다.
그들이 이 고난의 순간에 “영광”과 자리와 크기를 구할 때
자신이 무엇을 구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들의 간구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것은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러 오신 구세주시라는 고백이 아니요,
단지 나를 형통하게 해줄 자이기만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예수가 구세주로 약속된 “다윗의 자손”임을 알았고,
그리고 자신이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을 간구했다.
그는 자신이 맹인인 것을 안다.
그러므로 자신이 눈을 뜨기를 원하는 것도 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예수께서 눈을 뜨게 해주실 분인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는 약속된 “다윗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는 것을 구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구하는지 알고 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말씀은
바디매오가 신통한 믿음의 능력을 가졌다는 뜻이라기보다는,
이 맥락에서 직접적으로는 그가 잘 간구(기도)했다는 의미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는 제자들과 달리 자기가 아는 것을 구했다.
그것이 믿음이다.
눈을 뜨게 할 믿음(능력)이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을 ―영광이나 자리나 크기가 아니라― 예수께 구하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누구신 줄을 분명히 알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믿음이다.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 그 예수를 의지하는 것.
반면에 제자들은 예수를 높은 위치에 올라 측근들에게 한 자리씩 줄 자로 알고 있다.
그리고 자기 동료들보다 조금이라도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이것은 ‘수신자’가 예수님인 아닌 편지를 발송한 것과 같다.
‘번지수를 잘못 찾은 것’이다.
그들은 빌라도나 헤롯에게 보낼 편지를 예수께 썼다.
그 간구는 아무 효력이 없을 것이다.
바로 그것이 믿음이 아니다.

예수께서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데
한 가련한 장애인 거지는 예수께 믿음으로 나아가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3년 넘게 예수와 동행하고 특별한 가르침과 권능을 받았던 제자들은
이 마지막 길에서 예수께 갖지 말아야 할,
세상의 지배자들에게나 가질 믿음을 가지고 있다.
그 믿음은 구원과 영생과 상관이 없다.

나는 참으로 예수께 잘 구하고 있는가?
예수를 잘 의지하고 있는가?
지금 이 세계를 위해서 온전한 믿음의 기도가 절실히 요구되는 이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