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10:1-16, 창조 때로 소급)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시험하는 자다.
그들은 배우려는 자가 아니라 시험관 행세를 한다.
진정으로 무엇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께 올무를 씌우기 위해, 궁지에 처하도록 도발한다.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이혼의 정당성에 대한 질문은 바리새인들 가운데도 상당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아내의 부정을 발견하지 않으면 이혼해서는 안 된다,
아내가 음식을 망치기만 해도 이혼할 수 있다,
남편이 아내보다 예쁜 다른 여자를 발견하기만 해도 이혼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각 파의 이해에 따라 강온의 단계로 구분이 되고
이에 대한 율법적 해석이 고안되었다.

구약의 율법은 분명 이혼에 대한 규정이 있다.(신명기 24:1)
“사람이 아내를 맞이하여 데려온 후에
그에게 수치되는 일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면
이혼 증서를 써서 그의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보낼 것이요”
그러나 맨 마지막 책, 말라기에는 이런 말씀도 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가 이르노니
나는 이혼하는 것과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하노라”
하나님께서 이혼을 미워하신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신명기로, 또는 말라기로 소급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혼이 결혼에서 생기는 문제요, 결혼을 깨뜨리는 조처라면,
결혼의 근원으로 올라가야 한다.
“창조 때”, 즉 창세기에 하나님께서 맨 처음에 하신 일 가운데 하나로
“결혼”을 제정하시던 그 장면이다.
결혼의 근본은 이것이다.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이것을 예수께서 되뇌셨다.
창조 질서와 율법 사이에는 타락이라는 사건이 있다.
율법은 창조 질서가 왜곡된 현실 세계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야 하는 규범이다.
그것은 현실 세계보다 나은 삶을 사는 것으로서 제시되지만
그것이 곧 창조 질서, 또는 하나님 나라의 구현은 아니다.
예수께서 바로 그 본질을 말씀하셨다.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러저러한 중간적 장치들이 만들어졌다.
창조 세계에서 결혼은 부부의 온전한 연합이므로 결코 갈라질 수 없지만,
타락한 현실 세계에서는 실수와 실책과 오해와 범죄가 발생한다.
그에 대한 공의와 긍휼의 해결로서 이혼 증서의 발부가 시행된다.
그것은 정말 특별한 경우에 하는 수 없이 시행되는 미봉책이다.
그런데 이것을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가에 연연하며,
결국에는 자기 욕심을 위해 인간들이 그 범위와 한계에 대해 쟁론을 벌이는 데까지 왔다.
여기에는 거룩함도, 연합도, 회개도 전제되지 않는다.
남존여비의 가부장적 구도에서 남자들의 정욕의 도구로 전락했다.

예수님은 창조와 타락의 중간적 규범을 제시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메시야, 그리스도, 구세주는 구원하는 자다.
그는 타락한 세상에서 적당히 상대적인 의를 제시하러 온 것이 아니다.
구세주는 인간의 절대적인 문제를 절대적으로 해결하는 자다.
온전한 연합을 위한 결혼 안에서 “수치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지만,
그러나 진정 하나님의 자녀라면 무엇인든 서로 용서하고 화목할 수 있다.
예수께서 이제 점점 분명히 드러내시는 그리스도의 전모가 바로 이것이다.
죄로 죽을 만민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죄를 대속하신다.
예수께서 많은 고난을 받으신다.
즉 죄인이 받을 죄의 대가로서 벌을 대신 받으시는 것이다.
거의 모두 상상조차 하지 못한 구세주의 고난의 의미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를 위해 아들 예수께서 희생되셨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의 타락한 현실 세계에도 성도 사이에는 적용되어야 한다.
적용될 수 있다.
예수께서 이것을 위해 오셨다.

물론 예수께서 죄인들―세리,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인―을 긍휼히 여기신 것을 보면
이혼한 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도 알 수 있다.
나는 늘 실수를 하고 죄를 짓지만 정말로 이혼을 하지는 말자.
그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온전한 연합의 사랑을 하자.
어떤 실책과 범죄도 서로 용서하고 화목을 회복하자.
믿는 부부 안에 살아계시는 주님을 의지하여 그렇게 하자.
그러나 또한 어떤 상황에서든 이혼하고 마음이 어렵게 된 형제자매들을
깊이 이해하고 판단하지 말고 온전히 위해야 한다.
예수께서 하신 일을 생각하면 나의 결혼이 어떠해야 하는지,
내가 이혼한 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진다.
성도는 모든 문제를 현실 세계의 상대적인 의를 넘어
근본, 곧 창조 세계에서 하나님의 근원적인 뜻이 무엇인지 헤아리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