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30-50, 누가, 무엇이 크냐)

예수께서 제자들과 계실 때는 점점 더 특별한 말씀을 하신다.
고난에 대해서 예고하시고, 그 안에는 심지어는 죽음도 포함된다.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말씀도 하시는데 제자들은 다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지 못해도 무엇이 더 좋은지, 바랄만한지는 구분할 수 있다.
고난과 죽음은 안 좋고 살아나는 것은 좋다.
전체를 이해하지 못할 때 빠지기 쉬운 것은 아전인수,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것이다.
좋은 것은 극대화하고 나쁜 것은 배제한다.
당연히 살아나는 일은 부각되고 고난과 죽음은 무시될 것이다.

더구나 제자들 사이에 “쟁론”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실 다툼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리다툼이었다.
“누가 크냐” 이것이 토론 주제였다.
혹시 예수께서 세 제자만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갔다 오셨기 때문일까?
제자들 사이에 ‘크기’ 싸움이 벌어졌다.

삶과 죽음 같이
큰 것과 작은 것도 일반적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된다.
큰 것은 좋고 작은 것은 나쁘다.
우열구분이 이루어진다.
당연히 제자들은 자신이 더 크기를 바랐다.
“누가 크냐”는 질문은 누가 더 중요하냐, 더 힘이 세냐, 더 옳으냐로 연결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 구분을 뒤엎으신다.
작은 것이 더 중요하고 더 힘 있고 더 옳다.
파격적이다.
그것을 더욱 확실히 보여주시기 위해 작은 것들의 예를 나열하신다.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님과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주님께 상을 받고 안 받고가 “물 한 그릇”에 의해 결정된다.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우습게 알면 목숨의 대가를 치른다.
다시 말하면 어린 아이 하나가 예수님과 하나님과 동급으로 이야기되고,
물 한 그릇이 천국을 보장하며,
작은 자 하나가 생명과 죽음을 결정한다.
그 정도다.
그 정도로 작은 것이 중요하다.
제자들과 우리 모두에게 굳어져 있는 구분을 이용하여
“누가 크냐”, ‘무엇이 크냐’라고 묻는다면,
예수님의 답은 작은 자가 크고, 작은 것이 큰 것이다.
반대로 큰 자는 작고, 큰 것은 작은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작은 것이 큰 것보다 더 중요하고,
더 힘세고, 더 옳고, 더 좋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크고 작은 것의 가치에 차이가 없다.
어린 아이도, 어른도 영접해야 한다.
물 한 그릇뿐 아니라 집이라도 제공해야 한다.
작은 자뿐 아니라 누구라도 실족시켜서는 안 된다.
크고 작은 것의 구분이 바뀌었다기보다는
그 구분 자체가 아예 잘못되었다.

예수께서 고난·죽음과 생명을, 나중에는 십자가와 부활을 말씀하실 때
제자들에게는 생명과 부활만 마음에 든다.
그것이 크고 중요하고 옳다.
고난과 죽음과 십자가는 무시할 정도로 작고 심지어 옳지 않다.
이미 베드로가 고난에 대한 예수님의 첫 말씀에 “항변”한 것도 그러한 연유다.
제자들의 크기 “쟁론”도 같은 맥락이다.

예수께서 주실 구원은 이런 것을 깨는 것이요,
이것에 얽매인 판단을 무너뜨리시는 것이다.
작은 자도 귀하고 큰 자도 귀하며, 작은 선대가 큰 사역만큼이나 중요하다.

그 귀결은 무엇인가?
“서로 화목”하는 것이다.
내가 모든 사람과 화목하지는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구나.
내가 사람을 크기로 차별하고 큰 것과 작은 것을 우열로 구분하는 데 있구나.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눈에 들려는 얄팍한 수법이 아닌가.
내가 사람 차별하는 것을 회개하며
내게 “사람 사랑”(디도서 3:4)이 부족한 것을 도와주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