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9:2-13,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어제 본문에서 ―오늘 본문의 엿새 전에― 제자들은
예수님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
‘인자의 죽임 당함’에 대해,
제자들도 ‘목숨을 잃을 것’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처음으로 “고난”, 그것도 “많은 고난”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베드로가 예수를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라고 정확히 고백하고
예수께 “네가 복이 있도다”(마태복음 16:17)라는 칭찬을 받은 뒤에 하신 말씀이었다.
제자들은 그 뜻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고,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은 예수님의 진의와는 다른 영광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리고 엿새 후에 예수님은 세 명의 제자들을 이끌고
“높은 산”에 오르셔서 “변형”되셨다.
예수께서 세상에서 볼 수 없는 희고 밝은 빛 속에 ―빛을 뿜으며― 계셨고,
그 옆에 엘리야와 모세가 있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영광’의 장면이었다.
베드로는 여기에 계속 머무르기를 바랐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몹시 무서워”했다.
‘영광’은 베드로가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할 때 유념했던 것 아닌가.
그러나 막상 예수님의 영광―그것은 모세와 엘리야까지 함께 한 ‘천상의 영광’이었다―을 보았을 때
감당할 수 없었다.
사실 구약성경에서도 그 누구도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었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드러나는 것은 자신의 죄뿐이었다.
그래서인가?
베드로와 제자들은 “몹시 무서워”했다.
그들은 예수님의 영광도 이해할 수 없었다.
고난은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산에서 내려와 다시 “고난”에 대해 말씀하신다.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엿새 전의 말씀과 같은 내용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한 말씀을 더 설명해주셨다.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인자(예수)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는 것이 이미 “기록”되어 있다는 것이다.
어디에?
당연히 성경에.
예수의 고난은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정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예수 사이에만 오고간 밀담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말씀이다.

제자들은 ―사실은 당시에 모두― 구세주의 고난에 대해,
그것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에 대해 알지 못했다.
모든 사람이 자기가 바라는 대로 구세주를 기대하고 있었다.
예수님은 언젠가 전세가 역전되어 인기를 다 잃고
결국 패배자가 될 것을 내다보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관심을 더 고조시키기 위해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시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고난이 성경에 기록된 것이기에,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오직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자신이 오셨기에
“많은 고난”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에 그 예고를 충분히 들어왔음에도
그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하여 공포 속에 은신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바로 이것이다.
고난과 부활이 “기록”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를 만나신 예수님은
부활을 믿지 못하는 그들을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여”라고 하셨고,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셨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했다.
그 저녁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성경을 풀어” 주셨다.(누가복음 24:25-32)
그리고 더 나중에 사도 바울은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음을 강조했다.(고린도전서 15:3-4)
이 모든 말씀은 예수의 고난과 부활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었다는,
미리 하나님께서 알려주셨다는 사실에 초점이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오늘 본문에 벌써 강조하시는 것이다.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그러니까 베드로와 제자들이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성경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모르면 자신의 생각을 신앙으로 여긴다.
자기가 생각하고 바라는 것을 믿는다.
자신이 상상하는 구세주를 기다린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말씀을 마음에 두”었다.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라는 그 말씀을
지금은 알 수 없어도 그들은 그것을 마음에 두어 곧 모든 것을 다 알게 된다.
지금 이해하지 못해도 그 “말씀을 마음에 두”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
아,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곧 마음에 두는 데서 시작하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