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1-26,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

예수께서 광야에서 “또 큰 무리”를 가르치셨는데
이번에는 사흘이나 연속되었다.
오늘날 우리식으로는 일종의 ‘수련회’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먹을 것이 떨어지자 예수님은 그들의 배고픔을 불쌍히 여기셨다.
예수께서 염려하신 것은 이들이 굶은 상태로 집으로 돌아가다가
기진하게 되리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주최 측이 욕먹지 않을까, 이런 걱정이 아니었다.
나의 자비나 동정은 사실 나의 위신을 위한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예수께서 이들이 먹지 못한 것을 불쌍히 여기시자
제자들은 “이 광야 어디서 떡을 얻어 이 사람들로 배부르게 할 수 있으리이까” 하고 반문한다.
이들에게는 큰 무리의 배고픔보다 자신에게 돌아올 책임이 없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그리고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이들이 이와 똑같은 상황을 이미 얼마 전에 경험했었다는 사실이다.
오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를 기억한다면,
이들은 이번에도 예수께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적은 것으로
이 많은 사람을 먹이실 수 있음을 생각했어야 한다.
그리고 먼저 그렇게 말씀을 드렸어야 한다.
‘주님, 저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떡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인데
이것으로 지난번과 같이 모두를 먹여주십시오.’
그 일은 다시금 일어났지만 제자들의 믿음을 통해서는 아니었다.

이 어마어마한 일이 있은 뒤에
다른 지방의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힐난”과 “시험”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했다.
“표적”이란, 증거, 표징, 기적, 이적을 말한다.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표적,
즉 하나님께서 직접 보여주시는 증거다.
그것을 보여달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들의 요구를 거부하시고 다른 곳으로 떠나셨다.
예수께서 이미 수많은 “표적”을 보여주셨는데 이들은 지금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가?
오병이어와 칠병이어 이적을 듣지 못했는가?
어디든 거의 다 따라다니면서 시비를 거는 자들이
만 명씩 모이는 거대한 모임에는 가보지 않았겠는가?
이들은 이미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께서 병 고치시는 것을 직접 보았고,
귀신을 내쫓는 사역을 목격했다.
그럼 지금 이들은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가?
뭘 보여주면 그것을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이라고 인정하겠는가?
이들은 어떤 것을 보아도 믿지 않을 것이다.
다른 힐난과 시험의 빌미만 찾을 것이다.
병을 고치면 안식일 준수 여부로 시비를 걸고,
귀신을 내쫓으면 귀신에 들린 것 아니냐고 공격한다.
이것을 하면 저것을 해보라고 할 것이고
저것을 하면 또 저것을 하라고 할 것이다.
이들은 진정으로 표적의 여부를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결국 예수를 자신의 손에 좌지우지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들 손에 놀아나겠는가?
그들은 “누룩”과도 같다.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을 어떻게든 훼방하기 위해
사람들에게 불신을 조장하려고 버둥대고 있다.
예수님은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셨다.

그런데 더 탄식할 일이 있었다.
예수께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보았고 믿는 제자들이 “아직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얼마나 많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았는가!
그런데 자신들이 뭘 봤는지, 그럼으로써 예수께서 누구신지,
아직 제대로 깨닫지 못한다.
이들은 얼마 전에 경험한 것과 똑같은 일이 벌어져도
마치 처음 보는 일처럼 무지함으로 반응한다.
이들은 스승의 지도에 둔감한 학생이다.
학습의 반복이 누적되지 않고 더 나은 성숙의 진보가 보이지 않는다.

예수님을 시험하지는 않아도,
믿은 지 오래 되었으면서 진보가 없다면 답답한 일이다.
주님이 누구신지 더 깊이 깨닫는 것,
그리하여 주님과 더욱 깊은 교제를 나누는 것,
더 온전히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
즉 사람들 판단하지 않고 진실로 존대하고 위하며 자비로운 것.
이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이미 본 성도가 할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