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7:24-37, 소문의 열매들)

두로, 시돈, 데가볼리는 유대인들에게는 이방 지역이다.
예수께서 당시로서는 아주 먼 곳까지 가셔서도 말씀을 전하시고 치유의 사역을 하셨다.
사실은 예수의 도착보다 소문이 더 먼저 와 있었다.
그리고 그 소문은 그냥 입방아 찧는 풍문이 아니었다.
그 소문을 통해 사람들은 ―이방인들은― 예수께서 무엇을 하시는지를,
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의 한 여인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예수께 몸을 던졌다.
탐색을 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렇게 했다.(“곧 와서 그 발아래에 엎드리니”)
여인의 귀신 들린 딸을 위한 간구에 예수께서 보이신 반응은
그가 평범한 유대인의 선민의식과 오늘날 호되게 비판받을 인종주의에 휩싸여 있는 것으로
보이기에 충분할 것이다.
예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자녀”와 “개”로 비유하셨고,
그리하여 무슨 치부나 기복을 구한 것이 아니라 딸의 치유를 간구한 어미의 부탁을 거절하셨다.

그러나 그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단지 예수님이 그럴 분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실제로 예수께서 이 여인에게 하신 말씀과 행위에서 우리는 진실을 안다.
예수님은 이방 여인을 묵살하신 것이 아니라
그를 믿음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높이셨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은 스승으로서 그녀를 훌륭하게 학습한 제자로 만드셨다.
그것은 고급 학습 과정이었다.

예수님이 혈통적으로 자녀와 개를 구분하는 예를 드신 것은
사람들의 입으로 표출되었던 당시의 상식을 전복하셨던 이전의 가르침을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그때(3장) 예수님은 가족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셨다.
그것이 곧 복음이 변화시키는 능력이었다.
복음은 혈통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복음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로 만든다.
예수님은 지금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이 말씀을 복습시키고 계신다.
그가 얼마나 예수님의 소문을 제대로 들었는지 확인하고 계신다.
그때 그 말씀의 복습과 확인은 무엇인가?
이 이방 땅에서 예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 보이고자 하시는 능력은 무엇인가?
혈통적으로 유대인만 하나님의 자녀요 이방인은 거기서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자―가 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초대받는다는 사실이다.
즉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반어적인 교육이었다.
그것은 ‘너도 유대인은 “자녀”요 너 자신은 “개”로 생각하느냐?
내가 그렇게 구분하는 줄로 생각하느냐?’고 묻는 반문이다.
그것은 ‘내 소문을 듣고 나를 믿고 내게 나아온 너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확증이다.
분명, 예수님은 이 여인의 믿음을 보셨을(아셨을) 것이다.
그것을 더욱 드러나게 하시고 확인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만약에 여인이 예상치 않은 거절에 위축되어 간구를 철회할지라도
예수님은 ‘바로 네가 상에서 배불리 먹을 그 “자녀”다’라고 정확히 가르쳐주셨을 것이다.
그것이 예수께서 이방 땅까지 가신 목적이지 않은가.
그들도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믿을 수― 있고,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음을 전하러 가신 것 아닌가.
예수님은 이 여인 한 사람이 아니라 두로 지방의 이방인들이 다 듣도록
이 대화를 하셨고 이것이 또 소문이 되어 제2의, 제3의 수로보니게 여인이 나오게 하신다.
소문의 열매로 이 여인이 예수께 나왔고,
그는 또 소문의 진원지가 될 것이고
그 자신처럼 예수를 직접 만나기 전에 이미 예수의 말씀을 믿고 예수를 구세주로 아는 자들이 나올 것이다.

예수께서 갈릴리 호수로 오셔서 “귀 먹고 말 더듬는 자”를 고쳐달라는 간구를 들으셨을 때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다.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
바로 이 마음이 모든 병자를 대하시는, 모든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다.
사실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도 예수님의 마음은 이것이었다.
예수께서 그를 고쳐주시자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맺힌 것이 곧 풀려 말이 분명하”여지자―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을, 그 소식을 “더욱 널리 전파”했다.
그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심히 놀라”
“그가 모든 것을 잘 하였도다” 하고 탄성을 질렀다.
이 사람들은 또 하나의 소문의 진원지 역할을 한다.
그리고 많은 열매로 맺힌다.

어떤 소문은 사람들을 불신하게 하고,
또는 진실한 사실에도 사람들이 진지하지 않게 반응한다.
심지어 현장에서 목격했던 바리새인들은
―소문만 듣고도 믿는 자의 믿음에 형편없이 부끄러울 정도로―
오로지 예수님을 불신하고 적대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진실로 만난 자들이 소문을 전하고, 그것이 진실이 된다.

아, 지금 이 시대에 예수 믿는 자들에 대한 소문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