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6:12-33, 르호봇)

목축이든 작물 재배든 농업의 근간은 토지요,
농업 경제에서 부와 재산의 척도는 땅이었다.
그러하기 때문에 땅은 역사에서 거의 언제나 경쟁과 분쟁의 요인이 된다.
땅을 차지하는 것이 곧 힘을 얻는 것이요 이기는 것이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땅을 차지하는 복’은
모든 경쟁을 물리치고 모든 분쟁에서 승리자가 되는 것을 보장해주시겠다는 것일까?
만일 그것이 목적이었다면
아브라함은 땅을 사든 점령하든 어떻게 해서든 땅을 차지하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땅을 약속 받았음에도 땅을 차지하는 일에 결코 매달리지 않았다.
아니다.
그는 모든 땅의 주인이신, 지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로부터
땅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기 때문에
땅을 차지하기 위해 애를 쓸 필요가 없었다.

아브라함이 돈을 주고 자기 소유로 한 땅은
먼저 사라를 위해, 그리고 점점 가족들의 장지로 쓸 막벨라 굴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 땅에서 나그네인 것을 아주 잘 알았기 때문에
땅을 차지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아들 이삭도 땅에 대한 태도에서 아브라함과 똑같았다.

이삭도 여전히 나그네로 살았다.
그는 한 곳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고
사람들이 놀랄 만큼 한 해에 “백 배”의 결실을 얻고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지만 그는 결코 땅 부자가가 아니었다.
그는 당연히 원주민, 즉 블레셋 사람들의 시기의 대상이 되었고
경쟁과 분쟁에 휘말린다.
그가 정당하게 얻은 부가 시기와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이때 그는 어떻게 하는가?
그 땅을 사수하는가?
아니다.
그는 그곳을 떠난다.
그것은 우선 우물에서 일어났다.
이삭이 우물을 파고 그 주위에 장막을 치며 목축들에게 물을 공급하자
블레셋 사람들이 와서 시비를 건다.
그곳을 “떠나라”는 것이다.
그렇게 원주민들은 외지 출신의 거부, 이삭에게 텃세를 부렸다.
그러면 이삭은 떠났다.
땅 주인들이 떠나라 하였으니 그는 떠났다.
그 다음의 장소에 가서 그는 새로 우물을 팠고,
또 다시 시기의 대상이 되고 다툼이 야기되면 그는 또 떠났다.
그렇게 에섹에서 싯나로 이동하고 거기서도 문제가 생기자 다른 곳으로 떠났다.
세 번째로 우물을 판 곳에서는 블레셋 사람들이 더 시비를 걸지 않았다.
이 경쟁과 분쟁에서 이삭이 이긴 것이라면
승리의 비결은 악착같은 사수가 아니라 오로지 양보요 미련 없는 떠남이었다.

그러고 나서 이삭은 그 우물을 “르호봇”이라 이름을 지었다.
그 것은 넓다는 뜻이었다.
분쟁은 좁아서 부딪침으로 생기는 것이었고,
더 이상 다툼이 없게 된 것은 넓은 곳에서 서로 부딪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곳이 지형적으로 넓었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없다.
무엇보다 이삭의 마음이 넓었다.
사실은 그에게 첫 우물인 에섹도, 그 다음 싯나도, 모두 “르호봇”이었다.
그는 분쟁이 사라질 때까지 넓은 곳으로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분쟁이 없는 넓은 곳으로 계속 나아갔다.
만일 아주 좁은 곳이라 할지라도 드디어 분쟁이 사라지면 그곳이 르호봇이다.
그러면 성도는 계속해서 넓은 곳으로 나아가는 자요
그가 가는 곳은 그 어디나 르호봇이어야 할 것이다.

분쟁을 피하여 넓은 곳으로 가는 것,
이것을 성품으로 말하면 바로 ‘온유’가 아니겠는가!
이삭은 그의 이름 뜻과도 같이 싸우거나 화를 내거나 경쟁해서 이기는 자가 아니다.
그는 참 온유한 자가.
지금 특히 분쟁의 원인이 되는 것이 땅이라면
그는 땅 문제를 오직 ‘온유함’으로 해결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바로 성경의 진리,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말씀을 선취(先就)한 것이다.

땅은 농업 경제의 핵심이요 기반인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약속하실 때 그 일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땅은 누가 가지면 그만큼은 남이 갖지 못하는 제한된 재산이다.
땅을 많이 가질수록 나는 부자가 되지만 다른 사람은 땅을 더욱 갖지 못하고 가난해진다.
이러한 소유와 부를 하나님께서 약속하시는 것인가?

그것이 아닌 것이 분명한 것은
바로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땅에 관한 진리로 “온유”를 말하기 때문이다.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며 풍성한 화평으로 즐거워하리로다”
이 말씀은 이미 시편(37:11)에서 다윗이 노래한 시 구절이다.
다윗은 선지자로서 예수께서 산상설교에서 하실 말씀을 미리 확증했다.
다윗은 목동에서 왕─처음에는 유다 지파의 우두머리로,
나중에는 이스라엘의 통치자로─이 되었는데,
그가 다스리는 영역이, 그가 우두머리로서 차지하는 땅이 점점 넓어졌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군사력, 정치력, 재력을 들어 땅 차지의 비결을 말하지 않는다.
그가 사울에게 쫓겨 광야와 굴을 전전할 때든지,
이스라엘의 최고 통치자가 되어서든지
그가 고백할 수 있는 진리는 이것이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는 진리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내가 무엇을 더 설명하겠는가!

이삭은 온유한 자였다.
경쟁이나 분쟁을 피해 떠나고 피하고 더 넓은 곳으로 갔다.
그랬더니 실제로 그가 가는 어느 곳이나 넓은 곳이 된 셈이다.
드디어 다툼을 걸었던 자들이 이삭의 온유함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인정했다.
그들은 이삭과 더 이상 다툴 수 없음을 알았다.
온유한 자와 어떻게 다투겠는가!

성경의 이 진리는 역으로 이렇게 적용하는 것이 또한 가능하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
그런데 온유하지 않은 자가 많은 땅을 차지(지배)하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로써 그는 자신의 온유함을 입증한 것인가?
부자─땅을 차지한 자─는 모두 도덕적으로 선한 ─온유한─ 것인가?
아니다.
땅을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그가 온유한 자가 아니면
그는 땅을 차지하지 못한 것이다.
그는 자칭 ─또는 세칭─ 부자라 할 것인지만
그는 온유하지 못하므로 땅을 차지한 자가 아니며 부자가 아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3:17)

그러므로 성도는 온유함을 위해 애를 써야 한다.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