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5:19-34,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큰 민족으로 이루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도
혈통적으로는 그 과정이 지난하다.
아브라함은 친 아들을 백세에 한 명 낳았고,
이삭은 결혼한 지 20년이 지나 60세에 두 아들을 낳는다.
그 20년 동안은 아이가 없었다.
이삭-리브가 부부도 부모와 같이 불임의 기간을 지나야 했다.
그리고 임신을 하고도 그들은 뜻밖의 난처한 상황을 맞는다.
그리고 이 부부는 이 일들을 기도로 해결해 나간다.
이삭과 리브가는 기도의 부부였다.

“이삭이 그의 아내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간구”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리브가가 임신하였”는데
뱃속의 쌍둥이가 “서로 싸우는” 일이 벌어진다.
리브가가 이 일로 심히 걱정한 것을 보면
일반적인 태아의 움직임 이상의 현상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리브가는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걱정한다.
이 말은 “이렇게 괴로워서야, 내가 어떻게 견디겠는가?”,
“어찌하여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또는 “왜 내게 이런 일이 벌어질까?”로 다르게 옮겨지기도 한다.
다 같은 뜻이다.
그의 푸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여호와께 가서 묻자”는 생각을 하고 그대로 한 것이다.
그에게는 태아들의 싸움이 매우 심상치 않게 보였고 크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이 일을 어찌할꼬’하고 자문을 하였지만 그는 바로 답을 찾았다.
“내가 어찌할꼬?”
우리말 번역의 글자그대로의 뜻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이다.
그리고 “어찌”, 즉 ‘어떻게’의 질문에 해당하는 답은 하나님께 묻는 것이다.
바로 기도다.
이삭이 하나님께 간구했듯이 리브가도 하나님께 간구한다.

이삭은 리브가를 들판에서 처음 볼 때 “묵상”하던 중이었다.
묵상이란 당연히 하나님 말씀을 생각하며 기도하는 것이다.
그는 묵상의 사람이었고 그것은 그가 또한 기도의 사람이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오늘 본문에서 실제로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 리브가도 기도의 사람이다.
이 부부는 첫 만남부터 묵상으로 시작했고,
아마도 그들이 처음 만난 대화 가운데도 그 묵상의 이야기가 “진술”되지 않았겠는가.
부부가 묵상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고 복되다.
어떤 일을 만나 감당하기 어려워 걱정될 때에
부부가 같이 기도하는 것보다 더 합당한 일이 없다.

에서와 야곱.
성경에 처음으로 나오는 쌍둥이 형제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이들에 대해 미리 하신 말씀을 언급한다.
이들은 각각 “국민”과 “민족”과 “족속”을 낳을 자다.
이삭이 20년을 기다려 둘밖에 낳지 못하지만
―그 이후로 이삭 리브가 부부는 더 아이가 없었다―
그러나 두 명이라는 소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 민족과 국민과 족속을 이루실 것이다.
이삭 한 사람을 통해서도 큰 민족을 이루실 하나님이 아니신가.
그렇다면 둘을 통해서는 더 큰 민족도 이루실 수 있다.

이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형과 아우의 사이에
“큰 자와 어린 자”가 바뀔 것이라는 말씀이다.
출생의 순서에 의한 장자와 차자의 위치가 뒤바뀐다.
이 둘의 사이는 강함과 섬김의 차이로 나타날 것이다.

강약과 순서가 얼마나 중요할까?
세상의 관례와 상식과는 다른 반전이 성경에는 종종 나온다.
그러면 강하고 약하고, 다스리고 섬기고의 차이가
하나님께 과연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모르겠다.
인간의 상식을 상대화시키는 하나님의 권능은
차자를 장자로 장자를 차자로, 강을 약으로, 약을 강으로 만드실 수 있다.
그러면 결국 강과 약, 상과 하, 모든 것이 하나님 안에서는 다 상대화된다.

두 태아에 대한 하나님의 예고를 구원의 여부와 관련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구원은 꼭 여럿 중에 하나만 받는 1등상이 아니다.
이삭이 이스마엘을 제치고 야곱이 에서를 물리치는 것이 아니다.
야곱은 열두 명의 아들을 낳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만 구원을 받는가?
아니다.
르우벤은 장자권을 잃음으로 구원도 잃는가?
아니다.
그렇다면 에서도 마찬가지다.
르우벤이 아비의 침상에서 범죄를 하므로 장자권이 요셉에게 옮겨 간 것과 같이
에서도 장자권을 소홀히 여겨 그것을 동생에게 잃는다.
하나님께서 쌍둥이 형제의 강약과 상하를 미리 정해놓으신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지만,
그것은 야곱의 열두 아들 가운데서도 나타나는 서열과 질서 정도의 의미일 수 있다.

이보다 중요한 것은
이스마엘도 에서도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큰 민족의 조상이 되지만
그들 스스로 아비의 믿음을 끝까지 따르는 일에 실패했다는 점이다.
그것이 문제다.
“하나님의 자녀”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다(요한복음 1:12,13)
지금 아브라함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누구는 배제하고 누구는 1등이 되는 “혈통”의 보존 작업이 아니다.
혈통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데 아무 상관이 없다.
누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인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다.
이스마엘에게도 에서에게도, 당연히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하나님을 믿는가, 더욱 구체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장차 보내실 구세주를 믿는가,
이것만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묵상하는 부부, 기도하는 부부,
하나님께 묻는, 즉 하나님을 의지하는 부부 이삭과 리브가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