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8:10-22, 이 땅에 복된 자로 돌아오리라)

야곱이 집을 떠난다.
하란 외삼촌댁에 가서 믿음의 가정 안에서
아내를 고르기 위한 혼삿길을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실제적인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 속임을 당한 에서가 자신에 대해 품은 살의로부터 보호되기 위해
도피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지금 피난길을 떠나고 있다.

그가 떠나는 이 길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여정이라는 대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혼은 도피와 병행하여 주어진 부수적인, 아니 위장된 목표였다.
그는 같은 길을 이미 오간 아름답고 의로운 노정에 비하면
부끄러운 걸음을 떼고 있다.
아브라함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오던 길은 얼마나 용기 있는 신앙의 길이었는가.
그는 오로지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여 이 먼 길을 왔다.
아브라함의 종은 주인의 명령에 따라 이 길을 왕복했다.
그의 충성스런 순종의 길 덕분에 이삭이 믿음의 여인을 아내로 만났고,
야곱도 태어나 지금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야곱은 아버지와 형을 속인 죄를 짓고 홀로 외로이 도피의 길을 떠난다.
이 길은 영광의 여정이 아니다.
아름답지도 의롭지도 않은 길이다.
그의 불순종이 자초한 도피의 길이다.
하나님께 죄스러운,
어느 때고 하나님께서 내려오셔서 혼내시고 벌을 주실 길이다.
아마도 그 정도의 생각으로
─자존감 없이, 후회와 반성으로, 자책과 회개를 하면서─
길을 떠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주신다.
야곱이 답답한 마음으로 요청하고,
‘하나님, 제발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하고 간청하지도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다.
하나님께서 특정한 누구를 만나실 때
그는 이를 위해 특별하게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죄 짓지 않고 정결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사모하다가,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는 가운데 만나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원하실 때 만나신다.
죄를 지은 뒤의 아담과 하와에게 오셨으며,
죄를 품고 음모를 꾸미는 가인에게 오셨다.
하나님은 정결하게 준비된 자에게만 오시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상태에 있는 자에게도 오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선하신 권능으로 사명을 북돋우시며 복을 약속하시고 위로와 평안을 주시기도 하고,
또는 훈계하시고 꾸짖으시고 돌이키게도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권능이 사람을 기계로 만들어서
하나님이 약속하시면 그가 확신하고,
훈계하시면 경성하고,
꾸짖으시면 회개하는 일이 무조건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때고 나를 만나주신다는 사실에
놀라고 감격하고 감사하지 않는다면 이보다 어리석은 일은 없다.

도피의 길을 떠나는 야곱은 너무도 막연하고 불안하다.
그는 실패자다!
영적으로 실패했다.
그 쓰라리고 무기력한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것 같다.
리브가는 “몇 날 동안”이면 형이 모든 것을 잊어버릴 것이요,
이 길도 그 “몇 날”이면 다 끝날 것이라고 말하지만
그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을 미리 안다.
그 같으면 그게 “몇 날 동안”에 잊힐 일이겠는가!
그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오셔서 하시는 말씀은 무엇인가?
바로 그것이다.
그가 돌아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셨던 약속을 야곱에게도 확약하신다.
“네가 누워 있는 땅을 ··· 주리니”
‘하란 땅을 주리니 거기서 살 것이다’가 아니다.
지금 이 땅을 주리니,
그러므로 네가 반드시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이렇게 약속하신다.
그게 “몇 날 동안”에 될 일이 아닌지 하나님도 아신다.
하나님은 리브가처럼 “몇 날 동안”보다
“이 땅”과 “돌아오게” 될 사실을 강조하신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어떻게든 가능할 것이다.
하란에서 지금보다 더 크게
─차라리 형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이 나을 정도로─
실패하여 돌아올 수도 있다.
하나님이 그걸 약속하시는 것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셨던 것을 거듭 말씀하시는데
바로 “복”을 약속하신다.
그 복은 “땅의 모든 족속이”
그와 그의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사실이다.
그는 실패자로 돌아올 것이 아니다.
지금은 실패했어도 그는 “복”된 자로 돌아올 것이다.
지금은 아버지와 어머니와 형에게 큰 근심과 증오를 불러일으킨 자이지만,
그로 말미암아 모두가 “복”을 받을 “복”된 자로 돌아올 것이다.

하나님께서 간교한 자를 만나신다.
하나님께서 실패자를 만나신다.
하나님께서 범죄자를 만나신다.
그리하여 그와 똑같은 나도 만나신다.
참으로 감사하신 하나님!
그러면 나도 야곱과 같이 놀라고 감격하고 감사해야 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