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7:41-28:9, 짧은 생각 긴 이별)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인 것을 안 에서의 반응은 극렬했다.
그의 분노의 진행은 이러했다.
야곱이 받은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야곱을 미워하여”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야곱을 죽이리라”
축복이 미움으로,
그리고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과 동생 살해의 계획으로 이어졌다.

가인의 죄악이 재현되고 있다.
사실은 죄의 종류가 무엇인지에서 차이가 있을 뿐
모든 범죄는 가인의 재현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그 말씀은 가인의 특수한 경우에만 해당되는 내용이 아니었다.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말씀이며,
죄 앞의 모든 인간을 위해 주신 말씀이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은 이때도 에서에게 이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그것은 어느 때고 죄 앞에서 머뭇거리고 있을 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내게 이 말씀을 얼마나 자주, 많이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것을 막지 않았냐고,
왜 가인의 범죄를 막지 않았냐고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죄의 현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께서 강력하게, 안타깝게 말씀하시고 내 마음을 움직이신다.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죄를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의 감화에 순종하는 것이요,
죄를 짓는 것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죄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다행히 에서의 음모는 실행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죄를 다스린 것인가?
아니다.
그는 단지 보안에 허술했을 뿐이다.
그 자신이 동생 살해 작전을 발설한 꼴이 되었다.
그의 혈기는 엄청나서 이 무시무시한 계획을 마음으로만 품지 않고
말로까지 드러내어 결국 리브가의 귀에 들렸다.
그리하여 야곱을 일단 하란으로 피신시키는 리브가의 작전이 시행된다.
이렇게 일이 틀어진 상황에서 이것이 어미의 최선책이었을 수 있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하란으로 가라.
그 참에 외삼촌 집에서 결혼까지 하라.
그러면 아버지도 수긍할 영적 정당성도 확보하고
형제의 불화를 무마할 시간도 벌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이 두 가지 뜻은 다 이루어지는데 문제는 시간이었다.
리브가의 작전의 전제는 짧은 시간이었다.
가나안에서 하란을 오가는 “몇 날 동안”,
그 시간이면 에서의 화도 풀릴 “몇 날 동안”,
이것이 리브가의 전제였다.
그러나 둘 다 그의 계산이 틀렸다.
야곱은 ‘한’ 결혼뿐 아니라 ‘네 번의’ 결혼과 정착까지 하며
20년 동안 하란에 머문다.
그것은 에서의 화가 “몇 날”만에 풀리지 않은 것과도 관련되는 것이었다.
20년 뒤에 귀향할 때 야곱은 여전히 이 문제로 두려워했고,
형이 과연 화가 풀렸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에서의 화가 결코 “몇 날 동안”에 풀릴 수 없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리브가의 생각은 짧았던 것이 분명하며,
야곱과의 이별은 무지무지하게 길어진 것이 분명하다.
이 가정의 화평은 “몇 날”이 아니라 20년이나 유보되었다.
그 사이에 한 번도 오가지 않았으니
사실 야곱은 부모와 형에게 죽은 존재나 마찬가지다.
“몇 날”만 죽은 듯이 사라지면 되리라 생각했지만
그것을 20년 동안이나 오래 해야 했다.

“죽이리라”는 살해 음모 때문에 벌어진 그 긴 20년의 세월 동안에
네 식구 가운데 아무도 죽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큰 은혜였다.
하나님은 늙은 이삭도 그 20년을 더 살게 하셨다.
최종적으로 화해가 이루어진 것은 정말로 하나님의 큰 은혜였다.
인간적인 계산과 음모로 택한 우회로는 큰 불행을 낳았다.
그 지연은 가족의 화목에 얼마나 큰 손실인가.
그 지체는 세상에서 복이 되어야 할 성도의 사명을 얼마나 막심하게 훼손한 것인가.
그럼에도, 가까운 길을 멀리 돌고 돌아온 어리석음에도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시기를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원래의 기회로 이끄신 것은 얼마나 큰 감사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