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7:30-40, 너는 누구냐, 나는 누구냐?)

야곱이 아버지를 눈속임하고 축복을 가로 챈 것은
에서에 의해 현장에서 발각되지 않았다.
간발의 차이였을 것이다.
야곱은 이삭이 그를 축복하는 동안 형이 벌써 돌아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염려스런 예상에 거의 맞게
그가 이삭에게서 나가자마자 에서가 돌아왔다.

에서, 그는 자신이 장자로서 아버지로부터 그에 합당한 축복을 받을 것을
철썩 같이 믿고 있었다.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믿음을 보고 알면서도
영적인 데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축복에 집착한다.
그는 전에 동생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아먹을 때와는 전혀 달리
그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이고 있다.
전에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이었고 그날 “들에서 돌아와서 심히 피곤”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분명 더 서둘러서 더 힘을 써서 사냥을 하였음에도
그는 피곤하지 않다.
그는 이번에는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지 않는다.
그는 지금 ‘내가 장자의 축복을 받게 되었으니
그까짓 피곤이 무슨 상관이 있으리요’라고 말한다.
그의 영적 관심은 다분히 기회주의적이다.

그러자 이삭이 깜짝 놀라 “너는 누구냐”라고 묻는다.
에서가 자신을 밝히자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놀란다.
그 이후에 이어지는 이삭과 에서의 대화는 처절하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삭이 정말로 혼신을 다해 축복에 임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정말로 그가 말한 그대로 이루어질 것을 절대로 믿으며
그의 말에 절대적인 확신과 보증을 하며 축복했던 것이다.
오늘날 그냥 듣기 좋으라고 남발하는 축복기도와는 전혀 달랐다.
그는 그가 하는 말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이루시는,
변개할 수 없는, 엄중한 권위로 확실히 행했고 믿었다.

이건 축복의 정석이다.
축복은 정말 이런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 축복은 그가 에서에게 한 것이었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알리신 뜻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의 뜻을
영적 최고의 권위로서 축복의 언어로서 말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뜻을 하나님의 권위와 방법으로 행한 것이다.
얼마나 모순인가!

이삭은 에서와의 처절한 대화에서 자신의 잘못을 전혀 말하고 있지 않다.
그가 정말로 그것을 인식하고 있지 못한 것인가?
그는 마치 피해자 같다.
그는 야곱에게 당했다.
그러므로 에서만큼 그도 억울하고 통탄할 노릇이다.
그러나 이 순간 그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가 야곱 뒤에 들어온 에서에게 “너는 누구냐”하고 묻고는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을 들었을 때
그는 단박에 알아차려야 했다.
그가 엄청난 실수를 했다.
야곱이 엄청난 잘못을 하기 전에
그가 그보다 훨씬 엄청난 잘못을 했다.
그는 야곱이 장자의 권한을 꿈꾸기도 전에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자다.
그는 정말로 그것을 알면서도 일반 관습에 따른 자기 뜻을 이루려고
그렇게 고집스럽게 나아온 것인가?
아니면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듯이
태중의 아이들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분명히 하신 말씀을 역시 “가볍게” 여긴 것인가?
어느 경우든 그는 이제는 알아차려야 했다.
‘아, 내가 잘못했구나!’
‘이렇게 어마어마한 잘못을 한 나는 누구냐?’
‘내가 하나님의 뜻을 들었으면서, 알았으면서,
나는 그 반대의 일을 하나님의 권위로,
이제는 내가 돌이킬 수 없는 최고의 권위로 혼신을 다해 한 것 아닌가’
‘내가 무엇을 한 것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러나 이삭은 그저 억울하며 자신은 최고의 의무를 권위 있게 행했으므로
그 일을 변개할 수 없으며, 자기가 최선을 다해 하였으므로
전혀 아무 것도 남지 않은 축복을 에서에게 말할 뿐이다.

이삭은 하나님께 부복하고 하나님의 뜻에 거역한 것에 엄중한 회개를 해야 했다.
그리고 가족을 불러 다시 공개적으로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수습을 해야 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와 잘못으로 벌어진 문제를
하나님의 방법으로 수습하실 능력이 있지 않은가.
이삭은 자신과 관련하여 이스마엘과 하갈에게 있었던 가족사를 알고 있지 않은가.
그 갈등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풀게 하셨는지
이삭은 어려서 잘 몰랐어도 아버지께 듣지 않았겠는가.

이삭이 야곱에게 한 축복을 돌이킬 수 없는 것은
그가 이미 한 축복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 축복이 잘못된 것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돌이킬 수 있다.
인간이 실수로 한 축복이든 서원이든
다 하나님 앞에서 영적 권위에 따른 절차를 통해 번복할 수 있고
아름답게 해결할 수 있다.(참고: 민수기 30장)
─물론 이 경우는 해당되지 않는다.
만일 그가 에서에게 그렇게 축복했다면
그것은 잘못된 축복이며 하나님에 의해서 돌이키는 과정을 거쳐야 했을 것이다─
그는 그가 하지 않았던, 소홀히 여겼던
영적 분별을 위한 ‘가족의 대화’(가족회의)를 했어야 했다.
그가 늙어 모든 것을 자녀에게 물려줘야 할 오랜 시점에 이르도록
그가 소홀히 한, “가볍게” 여긴 하나님의 뜻을
가족과 함께 분별하는 일을 이제라도 했어야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불행하게 벌어진 일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잘 수습될 수 있을 것이다.
세월이 (쓴) 약이기 전에 하나님의 방법이 아름다운 해결임을 의지했어야 했다.
그러나 야곱과 에서의 화해는 하나님의 방법이 역사할 여지가 없이
그저 20년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의 힘만이 작동될 상황에 맡겨진다.
아, 내가 주로 써먹던 방법 아닌가!

나는 ‘너는 누구냐’라고 묻기 전에,
이미 물었다면 묻자마자 바로
‘나는 누구냐’를 물어야 한다.
‘내가 누구인가?’
여기에 모든 문제가 있다.
모든 문제는 내게서 벌어진다.
그러면 그냥 시간이 흘러 무뎌짐으로써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하나님께 무릎 꿇고,
그리고 사람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하나님, 제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감화하시는 권능에
제가 순종하기를 원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