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7:15-29, 눈속임)

“이삭은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이것이 이삭의 최대 약점이었고,
리브가와 야곱에게는 최대의 공략지점이었다.
아! 부부와 부자 사이에 공격과 방어라는 구도가 적용되어야 하다니!

이삭의 연로함은 나머지 감각, 즉 청각과 촉각과 후각에는 아무 지장을 주지 않았다.
시각이 문제였다.
눈앞을 잘 분간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리브가와 야곱은 이삭이 잘 보지 못하는 단 한 가지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나머지 모든 것을 상쇄했다.
이삭의 청각은 살아있었다.
그는 야곱과 에서의 목소리를 구분했고,
지금 축복을 받으러 나온 아들의 목소리가 야곱의 것임도 알아냈다.
이삭은 촉각도 살아있었다.
그가 평생 양을 치고 농사하면서 이제는 굳어진 손바닥과 손가락 마디이겠지만
그는 털이 많은 에서와 그렇지 않은 야곱을 촉각으로 구분할 수 있었다.
굳이 촉각에서 그의 노쇠를 말한다면
그는 털보 에서의 피부와 염소 새끼의 가죽을 구분할 수 있는 미세함은
이제 더 없게 된 정도였다.
이삭은 후각도 살아있었다.
그는 에서의 향취와 야곱의 냄새를 구분할 수 있었다.
아들의 몸과 옷에서 나는 향취를 구분했다.
본문에 미각에 대해서는 특정한 언급이 없다.
아마도 그를 위해 요리한 자는 늘 리브가였을 것이고
에서나 야곱의 음식이 차이가 나는지 구분이 안 되는지,
이삭의 미각이 둔감해졌는지 모른다.

이삭은 시각이 살아있지 못했다.
청각과 촉각과 후각과 혹은 미각까지도 다 살아있더라도
시각의 결핍이 이 모든 것을 무력하게 했다.
그의 시력이 문제가 없다면
다른 감각에 이상이 있어도 리브가와 야곱은 이삭을 속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밤중을 이용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무리 피부가 매끈하든, 목소리가 야곱 같든,
그의 향취가 에서와 다르든, 리브가의 음식임을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었든,
그에 상관없이 이삭이 야곱과 에서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시력만 있었다면
이 위험한 사기극은 진전될 수 없었다.

두 가지가 문제다.
리브가와 야곱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뜻을 이루기 위해
지아비와 아비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한다.
남의 약점을 이용한 사기,
이것은 더욱 야비한 속임수다.
리브가와 야곱이 한 일이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삭이 하고자 한 것도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이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그는 결국 자신의 뜻을 이루고 죽을 생각인 것이다.
아니, 죽을 때까지 자신의 뜻을 이룰 생각이다.
그런데 평생 그렇게 살아온 그 자신의 뜻을 이루는 일이
단 한 가지 약점에 의해 무효로 된다.

성경은 왜 이 장면을 아주 자세히 묘사할까?
리브가와 야곱의 행적이 아주 치밀하게 보고된다.
오늘날 언론의 특집 보도에서 볼 수 있는
특별 밀착, 집중 취재가 여기에 나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리브가와 야곱이 한 일을 보라는 것 아닌가.
그러면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열심인가?
그것을 이루는 비법인가?
성경이 그것을 가지라고, 배우라고 우리에게 이 장면을 이렇게 세세히 기록한 것인가?
오늘날 이런 식의 접근은 아주 흔하다.
자기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제목의 성취를 위해
온갖 집념을 다해 결국은 이뤄내는 과정을
세세히, 남부럽게, 비법과 비결로 과시하는 경우가 많다!
창세기의 오늘 본문이 과연 그런 의도로 기록된 것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여기서 신앙적 열심이나 헌신이나 간절함이나 대의나 명분을 보지 못한다.
볼 수 없다.
그것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것은 눈속임이다.
사기다.
거짓말이다.
범죄다!
그리고 이것이 이렇게 세부적으로 기록된 것은
내가 저지르는 그것을 자세히 보라는 것 아닌가.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먹고 내 뜻을 이루는 나의 탐욕을 보라는 것 아닌가.
나의 기도제목, 내가 꼭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구제목,
내가 나누고 부탁하는 중보기도 제목들,
그 안에 이런 게 많이 들어있다.
고난은 없고 형통만 있는!

이삭은 자기 꾀에 넘어진다.
리브가와 야곱도 그렇다.
결국은 아버지의 입에서 자신을 축복하는 말을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할지라도
―이삭은 야곱에게 축복한 것이 아니다.
그는 “야곱”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내 아들”에게 축복하고 있다―
그 축복의 말 때문에 그가 복을 받을 것인가?
실제로 하나님께서 에서가 아니라 야곱에게 복을 주시는 이유가
이 장면 때문일까?
복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주권이다.
인간이 연출해낸 위장극에는 아무 능력이 없다.
거기에는 단지 책임만 있을 뿐이다.
야곱이 복을 받고 에서가 복을 받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나아오는가, 죄를 회개하는가, 순종하는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나가는가,
한 마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가에 있다.
이삭도 에서도 리브가도 야곱도 이 순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
모두 자신을 의지했다.
그러므로 야곱이 나중에 복을 받는 것은 이 장면 때문이 아니다.
나는 나의 눈속임을 간증할 수 없다.
나는 그에 대해 오로지 부끄럽고 회개할 뿐이다.
그것은 나의 비법이 될 수 없다.
내가 지우고 싶은 부분일 뿐이다.
나는 진실로 하나님을 의지했어야 했다.
나는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더 기다려주시고,
나로 회개하고 돌이키도록 계속 감화하시고
변화시키신 것을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