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26:34-27:14, 영적 분별 – 가족의 대화)

에서와 야곱이 40세가 되었으면 이삭은 100세의 나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신을 낳았던 그 나이에
그는 40세의 두 아들을 가지고 있으니 더욱 감사할 것이다.
그러나 이삭은 아브라함보다 훨씬 더 늙었다.

오늘(과 내일) 본문은 하나님의 뜻은 인간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므로 인간의 과오 따위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논리로
종종 이용되기도 한다.
그러나 과연 하나님이 바라셨던 바는 무엇일까를 생각한다면
하나님의 뜻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을 심각한 내용이다.

쌍둥이 형제에 대해 미리 고지한 내용으로 하나님께 시비할 여지는 사실 없다.
생물학적으로 먼저 태어난 사람이 꼭 장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
옳거나 합리적이라고 말할 근거는 없다.
더구나 그것을 불과 순간의 차이로 형과 아우가 결정되는 쌍둥이에게 적용할 경우는
더욱 그렇다.
출생이 순서를 결정하는 것은 그저 한 가지 방법일 뿐이다.
하나님은 그 방법에서 얼마든지 자유로우시다.

태안에 있는 아이들을 장자와 차자로 구분하는 것은
천국과 지옥으로 분리하는 것이 아니다.
이삭과 이스마엘은 둘 다 아브라함의 “씨”로서
그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큰 민족”의 중요한 조상 역할을 할 것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나가면 그 안에 들지 못한다.
에서와 야곱도 그렇다.
영적 가장의 역할을 동생이 맡아도 형은 자신의 구실을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
말라기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1:2,3)고 전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한 결과였다.
야곱의 열두 아들에게서 보듯이
하나님은 여러 자녀 가운데 1등 한 사람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마엘도, 이삭도, 에서도, 야곱도
모두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큰 민족”을 이루는 첫 조상들에 포함되기를 바라셨다.
그 안에서의 역할 구분은 신약성경에서 분류하는 은사나 직분의 차이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자는
그 “큰 민족”에 속하지 못할 것이다.

이삭과 이스마엘 사이에는 야곱과 에서의 사이에서보다
가정 분쟁의 여지가 훨씬 크게 있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두 경우 모두 비극적이기는 하지만,
전자가 오히려 후자보다 갈등의 대처에서 더 나은 면을 보여준다.
가장 중요한 차이는 부부가 이 문제를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가 아닌가,
더욱 근본적으로는 이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는가 아닌가에 있다.
비록 거칠기는 했지만 사라는 자신의 마음―불평―을 토로했고
남편과 상의할 수 있었다.
아브라함이 “그 일이 매우 근심이 되”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사라의 말을 “다 들으라”고 말씀하신다.
아마도 ―분명― 아브라함이 했다는 “근심”이라는 말 속에 ‘기도’가 포함되어 있으리라.
그러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답을 주셨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삭과 리브가 부부 사이에는
두 아들의 영적 위치나 역할에 대한 이야기가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이들은 각자 자기 나름의 생각을 발전시켰고, 각각 그것을 추진한다.
잉태 과정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들었던 비상한 이야기를
이들은 중요한 영적 대화의 주제로 삼지 않았다.
더욱 근본적으로 이들은 각자의 논리는 발전시켰어도
하나님께 묻고 기도하는 과정을 가졌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답은 아주 간단했다.
하나님께 여쭤보면 되는 것이었다.
가장 좋은 것은 부부가 함께 하나님께 묻는 것이다.

그랬다면 인간적인 술수로서 속임수나 권위적 일방통행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부부만의 대화가 아니라 자녀도 포함된 가족의 대화가 되었어야 했다.
이것은 두 아들 자신에 관한 문제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셨으니까 어차피 시행될 거야’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하나님의 뜻에 어떻게 순종할 것인가에 대해 나누고 준비하고
같이 기도했어야 하는 문제였다.

야곱과 에서의 일은 각자 해결하면 되는 개인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부모와 두 아들 모두 함께 숙지하고 순종하고 참여해야 하는 가족사였다.
어찌 이 중요한 문제를 각자의 생각으로, 각자의 일로 진행하게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아름답지 못하게 ―사실은 죄까지 자행되면서― 진행된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는 사실로 이러한 문제를 정당화할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루어질 것이지만
인간은 그 과정에서 인격적인, 도덕적인 존재로서 책임을 진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이루시지 인간이 이뤄내는 것이 아니다.
야곱과 에서를 향한 하나님의 뜻은 리브가나 야곱의 방법으로 이뤄내거나,
이삭과 에서의 방법으로 저지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뤄진다.
그러나 리브가도 야곱도 이삭도 에서도 각자의 처신으로 인해
―함께 하나님께 묻고 답을 듣고 순종하는 과정을 갖지 못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 바라시는 화목을 이루지 못했다.
이들은 하나님께서 참으로 바라시는 순종을 이루지 못했다.

인간의 책임이란 무엇인가?
바벨론이 하나님께서 유다를 책망하시고 새롭게 하시는 도구로 삼으시지만,
그 자체가 바벨론에 어떠한 정당성도 주지 않는다.
만약 바벨론이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그 일을 행했다면
하나님께서 바벨론도 기뻐하시고 유다도 회복시킬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이 세상 권력의 법칙으로 ―자신이 역사의 주관자인 것처럼― 행세하다가
그 값을, 그 책임을 치른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정화시키기 위해, 회복시키기 위해
이스라엘이 치르게 하신 그 많은 대가와 책임을 성경은 낱낱이 전한다.
내가 하나님의 뜻이 최종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실을 빙자해서
나의 그 어떤 죄와 연약함도 간과하려 한다면
정말로 참으로 불쌍한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