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17:1-19,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여)

아사 왕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나뉜 뒤 유다의 첫 세 왕들 가운데 가장 훌륭했다.
그는 신앙적인 개혁─우상숭배를 근절하고 하나님을 찾는 일─을 대대적으로 행했다.
그러나 그의 41년 재위 기간 가운데 마지막 5년에 전쟁과 선지자의 지적과 질병 앞에서
그는 하나님을 찾지 않아 오점을 남겼다.
그의 아들 여호사밧은 35세에 왕이 되었고 25년을 통치했다.
그는 유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개혁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는 아마도 아버지의 개혁과 개인적 실패에 대해 주의 깊게 배웠을 것이다.

그는 솔로몬-르호보암-아비야-아사-여호사밧으로 이어지는 왕들 가운데
처음으로 “다윗”에 비교된 자다.
사실은 모든 왕이 다윗을 기준으로 평가될 것이다.
평가는 둘로 나타난다.
다윗과 같든지, 다윗과 같지 아니하든지.
솔로몬조차 다윗과 같다는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가 성전을 완공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을 때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가운데 다윗을 언급했지만
그것이 곧 솔로몬에 대한 평가는 아니었다.
“네가 만일 내 앞에서 행하기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한 것과 같이 하여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행하여 내 율례와 법규를 지키면
내가 네 나라 왕위를 견고하게 하되”(7:17~18)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리고 유다의 모든 왕에게 주신 명령이요 지침이다.
이것이 기준이 되어 모두 “다윗이 행한 것과 같이” 했는지 판단될 것이다.
솔로몬은 매우 뛰어났지만 성경이 그를 이 기준에 부합되는 것으로 직접 평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여호사밧은 “그의 조상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였다고 처음부터 단언된다.
그의 일생은 바로 그 내용─“다윗이 행한 것과 같이” 산─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오늘 본문에서만 살피면 그는 “하나님께 구하”는 일을 회복했다.
즉 하나님을 찾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한 것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행하”는 일에 전력한 것이다.
계명의 준행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하신 말씀에서도 매우 중요한 내용이었다.
아비야 왕도 그것을 북이스라엘과 다른 유다의 정체성으로 중시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나 너희는 그를 배반하였느니라”(13:11)

그러나 여호사밧 왕이 “다윗의 처음 길로 행하”는 일에서 진수를 보인 것은
하나님 말씀의 회복이다.
그는 “방백들”(지도자들)과 “레위 사람”과 “제사장”을 “보내어 여러 성읍에 가서 가르치게” 했다.
무엇을 가르친 것인가?
“그들이 여호와의 율법책을 가지고 ··· 모든 유다 성읍들로 두루 다니며 백성들을 가르쳤”다!
역시 아비야 왕도 “유다 사람에게 명하여 그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게 하며
그의 율법과 명령을 행하게 하”였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14:4)
그러나 역대하에서 “율법책”이라는 단어가 오늘 본문에서 처음으로 나온다.
왕이 ‘율법을 지키라’고 백성들에게 명하는 것도 그 시대의 역사에서 대단한 일이지만
그것은 다소 추상적인 외침으로 그칠 수 있다.
이에 비해 여호사밧은 매우 구체적으로, 치밀하게, 실제적으로, 계획적으로 이 일을 수행한다.
아비야를 훨씬 넘어선다.
솔로몬 때에도 이러한 전국적 “율법책” 교육에 대한 기록은 없었다.

신앙개혁, 즉 신앙회복의 본질은 말씀의 교육에 있다.
그것은 곧 “율법책”을 가르치고 배우고 묵상하고 실천하는 데 있다.
개혁이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이요, 그것은 본질에서 이탈했음을 전제한다.
바로 백성들이 “율법책”을 알지 못한 채, 읽지 않는 채, 그리하여 율법대로 살지 못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제 이 본질을 회복한다.
즉 “율법책”의 존재를 알며, 그것을 읽고, 그대로 사는 일이 일어난다.
이것은 그냥 하라고 지침으로 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지도자들이 각 지역마다 다니면서,
사람들을 모아 ─아마도 전체 모여, 또는 소모임으로 나뉘어─ 같이 읽고,
가르치고, 질문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기도하고 하는 일이 이어졌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전지구적인─ 전염병 상황에서 가장 위축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대면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서로 가르치며 나누는 말씀의 교제를 하는 것이 어려울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예배’에만 집중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얼마든지 말씀의 교제─서로 말씀을 나누는─가 가능한 대면의 장이 있다.
세상은 다 이 교육의 도구와 장들을 활용하고 있다.
불평 없이 묵묵히 학교가 돌아간다.
교회는 더욱 잘 돌아가야 한다.
교회는 어떤 때에라도 더욱 가르치고 배우고 나누는 일에 가장 실제적이며, 가장 앞서야 한다.
여호사밧의 개혁은 오늘 우리나라의 교회에서 다시 일어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