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기 11:1-23, 절대평가에서 상대평가로 전락)

이스라엘의 분열.
그것은 이제 두 나라가 서로 비교하고 경쟁할 수 있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의로운 목적을 위한 선의의 경주가 될 수도 있었고,
오직 이기기만을 위한 영 형편없는 파괴적 싸움이 될 수도 있었다.

분열의 시작은 솔로몬과 르호보암의 잘못에 의한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잘못의 대안으로 분열을 택하신 것이기도 했다.
북이스라엘의 건국, 또는 분국은 분명 하나님께서 여로보암을 세우심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정쟁에 의한 분열이 아니었고 남유다를 고치기 위한 하나님의 방편이었다.
그렇다면 여로보암은 솔로몬과 르호보암을 반면교사로 삼아 이스라엘의 신앙이 변질되지 않도록 백성들과 함께 최선의 노력을 했어야 했다.
르호보암은 졸지에 소국으로 축소되면서 자기 죄악의 현실을 깨닫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긍휼에 의해 재출발해야 했다.
그러나 양쪽에서 이와 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을 송아지 우상으로 교체했다.
그리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해임하고 우상의 제사장을 따로 임명했다.
예루살렘에 대한 대항 종교로 민심을 막으려 한 것이다.

르호보암은 어떠한가?
그는 먼저 이 치욕적인 축소를 만회하기 위해 군사적인 방도를 택했다.
그는 “이스라엘과 싸워 나라를 회복”하려 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전쟁의 승리가 아니라 오로지 회개와 신앙 회복을 통해서만 이뤄질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반대의 길로 가려고 한다.
참으로 다행히 하나님께서 선지자를 통해 경고─“너희 형제와 싸우지 말”라─하심으로 전쟁과 더 큰 죄악을 막으셨다.
그리고 다행히 르호보암과 유다 백성이 이에 순종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전개되고 있음에도 르호보암은 여전히 군사적 강화에 역점을 둔다.
그가 한 일은 “방비하는 성읍들을 건축”하고 “더욱 견고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상당히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88명의 자녀가 자신의 정치적 짐이 되지 않도록 ─서로 싸우지 않도록─ 머리를 쓰는 데 전념했다.
그는 모든 아들을 흩어져 살게 하고 양식과 여인들을 많이 구해주어 그것으로 만족하게 하여
후계자 문제가 자기 뜻대로 되게 했다.
역대기는 이 점에서 르호보암이 “지혜롭게 행하”였다고 한다.
그가 발휘한 지혜란 백성들을 재판하고 다스리는 지혜가 아니었다.

북이스라엘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이 유다로 돌아온 것은
이스라엘의 정체성과 정통성이 어디에 ─북에, 아니면 남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남으로 온 것은 남쪽이 진실로 신앙적이기 때문이었다고 할 수 없다.
르호보암이 선지자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전쟁 계획을 포기하기는 했지만
그가 나라의 기초와 구조를 신앙적으로 든든히 세우는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한 것은 단지 북이스라엘에서 행한 일을 하지 않은 것뿐이다.
즉 송아지 우상을 만들지 않고 제사장을 해임하지 않았다.
북이스라엘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고, 남유다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안 했다.
그것뿐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할 일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 의지하며 죄를 회개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즉 남유다는 북이스라엘보다 상대적으로 덜 나빴다.
이스라엘 한 나라였을 때에는 절대적인 평가만 있었다.
이스라엘과 비교할 대상이 될 나라는 없었다.
이스라엘이 제대로 신앙을 지켜 살면 절대적으로 잘 한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절대적으로 잘못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로의 분열은 상대방보다 나으면 상대적으로 나은 것이 된다.
절대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어도
절대적으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은 것 하나만으로도 상대방보다 조금 나을 수 있고,
그리하여 상대적으로 우월할 수 있다.
이제 이스라엘의 신앙은 상대적, 비교적으로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을 기준으로 삼는 것이다.
누구보다 나은 것으로 자신을 우월하게 여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을 무시하고도 누구보다 나으면 ─더 나쁘지 않으면─ 더 나은 것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역대 왕들을 각각의 상대국, 상대 왕과 비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평가는 언제나 다윗을 기준으로 하셨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평가하셨다.
상대적 비교의 폐해는 나의 완악함과 연약함을 변명하고 심지어 정당화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나는 남보다 조금이라도 나으면 ─덜 나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나를 얼마나 합리화하고 죄악에 대한 절대적 지각을 얼마나 둔감하게 했는가.

사람과의 비교가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야 한다.
르호보암은 여로보암이나 북이스라엘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