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7:2-16, 함께 죽고 함께 살게)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회를 생각하며 근심스러운 것이 많았다.
첫 편지에 나타난 구체적인 문제들 때문이었다.
그래서 교회 안의 분쟁, 음란의 문제, 은사에 대한 오해, 부활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
제대로 가르쳐 바른 신앙 공동체가 되도록 애를 썼다.
이와 함께 바울 개인에 대한 오해와 적대 문제가 있었고,
이것은 단순히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시비가 아니라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왜곡하는 것이므로 큰 근심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바울은 첫 편지와 별도로 또 하나의 편지를 써서 디도를 통해 고린도 교회에 전했다.
차마 바울이 직접 가서 대화를 나누기가 어려운 정도였다.

디도가 바로 돌아오지 않아 바울로서는 오래 근심에 눌려 있어야 했다.
그것은 바울의 편지가 고린도 교인들을 근심스럽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근심이었다.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한 것이 바울 자신을 위한 “육체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에서 나온 것이지만
과연 그들이 순종할 것인가, 더 나빠질 것인가 염려스러웠다.
이 순간 바울은 자신을 변호하여 자신에 대한 오해를 기필코 풀기 위해 이 편지를 쓴 것인가?
아니다.
그는 자신이 어떤 대접을 받아도 상관없었다.
문제는 자신이 어떤 취급을 받는가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가운데 고린도 교인들이 죄를 범하는 것과 그 교회가 진리의 공동체에서 벗어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성령의 감화로 진리로 바른 말을 하고도 사도는 아비와 같은 심정으로 연약한 자녀들의 마음이 어떻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에 대한 근심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 대해 근심을 하고 있다.

그런데 디도가 드디어 돌아와 고린도 교인들의 소식을 전해주었다.
이 소식이 단번에 바울의 모든 걱정을 사라지게 했다.
그 사이에 그가 마게도냐에서 당했던 모든 환난도 디도가 전해준 기쁜 소식으로 상쇄되었다.
모든 근심과 환난의 고통을 뒤바꿔 놓은 “위로”의 소식은 무엇인가?
디도를 통해 보낸 바울의 편지가 과연 진지하게 수용된 것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울이 염려한 대로 이들이 그 편지로 인해 “근심”하였으니
그것이 바울에 대한 적대적인 항변과 분노 서린 근심이 아니라
그들의 문제, 죄에 대한 근심이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곧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근심”이었으며,
그리하여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근심”이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룬다.
그 “근심”의 결과는 공동체의 정화로 이어졌다.
죄에 대한 분개와 회개와 “벌”(권징)이 바로 그것이다.

근심은 똑같은 것이 아니며 모두 나쁜 것은 아니다.
근심은 걱정이나 염려로 통하고 그것은 믿음의 결여로 판단되기도 한다.
그러나 죄로 인해 근심하지 않는 것이 불신이고 죄로 인해 괴로워하며 근심하는 것이 믿음이다.
“육체적 지혜”에서 비롯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고심하는 것,
심지어 남을 해롭게 하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아니다.

이 일에서 바울 사도의 의도와 중심은 무엇인가?
그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다.
혹시 형제의 죄에 대해 지적을 하여 그가 그것을 바르게 듣고 “근심”하며 회개하게 되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한 것이다.
그런데 만일 죄를 지적한 내가 그의 회개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정죄”하고 배제하기 위한, 결국 그를 낮추고 나를 높이기 위해 한 것이라면
나는 결코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를 죽이고 나만 살겠다고 한 셈이다.
아, 그러나 실상은 그는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여 살고,
그를 “정죄”한 내가 죄 짓고 죽는다.
그리하여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사는 뜻이 이루어지지만 정반대로 이루어진 꼴이다.
진실로 이루어져야 할 것은 “함께 죽고 함께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애초에 그것이 목표와 의도가 되어야 한다.
마음의 중심이 그것에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울과 같이 진실로 형제를 위해 “근심”함으로써만 가능하다.
형제를 진실로 사랑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 뜻대로 근심 하게 된 것”은 그 교회 공동체를 살렸고
그들을 위해 마음 아픈 “근심”을 하였던 바울이 큰 위로를 받고 살게 되었다.
바울이 애초에 중심 삼았던 “함께 죽고 함께 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생사 공동체에 대한 진정한 의식이 내게 얼마나 부족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