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6:1-7:1, 은혜의 때, 구원의 날)

사도 바울은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한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이르시되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49:8)
그 “은혜의 때”와 “구원의 날”이 언제일까?
바울은 바로 “지금”이라고 단언한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그 “지금”은 이 서신이 기록된 지금부터 약 1970년 전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 “은혜”와 그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다.
즉 예수께서 오심으로 그 날이 도래했다.
그리고 그 날은 예수께서 유대 땅에 살아계셨던 기간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이루시고 지금도 살아계시기 때문이다.
즉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뒤로 지금까지
하나님은 여전히 예수 안에서 죄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그들을 “구원”하신다.
그러므로 바울이 말하는 “지금”은 예수 이후의 모든 날이다.
그때도 “지금”이요, 지금도 “지금”이다.

어제 본문의 “대신”과 “위하여”와 “화목”은 모두 이와 관련된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이 “은혜”이며,
그리하여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자로 변화시키셨으며,
그것은 곧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하나님과 원수였던 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 계명을 순종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과 화목”하는 것, 곧 “구원”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고 권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그 은혜를 통해 얻게 되는 “하나님과의 화목”, 즉 “구원”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대속하심으로 죄인이 죗값을 스스로 치르지 않고 하나님께 용서를 받는 은혜가 허락되었다.
그것은 나의 어떠한 자격으로 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께서 “대신” 해주신 것으로써만 내가 얻는 “은혜”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가 너희 모두를 위해 죽었으므로 다 죄를 용서받고 구원을 받는다’라고 들려지는 선포가 아니다.
이 “은혜”는 “은혜” 베푸신 예수를 영접함으로써만 받게 된다.
예수를 모르거나, 믿지 않거나, 혹시 믿었다가도 떠난다면 그는 이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다.
“은혜”는 누구에게나 구원 받도록 예수께서 모든 이를 위해 “대신” 죽으신 사실인데,
많은 사람이 이 “은혜” 밖에 있게 됨으로 이것이 그들에게는 헛된 “은혜”가 된다.
가장 비극적인 것은 예수께 나왔다가 그를 떠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는 곧 죄인을 용서하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는, 회복되는 “구원”이다.
“은혜”와 “구원”은 원인과 결과이기도 하고 동반한다.
그러므로 “은혜”를 저버리는 자, 떠나는 자는 “구원”과 무관해진다.
그를 “구원”하기 위해 베푸신 “은혜”가 그에게는 헛된 것으로 된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은 자는 이사야 선지자가 계속 강조했던 “남은 자”로서 끝까지 믿음 안에 거하는 자여야 한다.

이론상으로는 예수께서 오신 뒤로는 “지금”이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므로
“지금”이라 불릴 모든 날에 그 “은혜”와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지금”이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 날부터 다시 오셔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때까지다.
그러나 각 사람에게는 그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의 시간에만 그것이 유효하다.
그러므로 “지금”이란 이 땅에 사는 동안뿐인데
아무도 과연 언제까지 살아갈지를 알지 못하므로 “지금”은 결코 느긋할 수 없는,
사실은 매우 한시적인 기회다.
바로 “지금” 정신 차리지 않으면 그 기회가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의 연약함과 제한성을 생각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이 겸손부터 시작한다─
이 “은혜” 안에 들어오지 못한다.
그에게 이 “은혜”는 헛된 것이 된다.

이 경고의 말씀은 현재 예수를 믿지 않는 예수 밖의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고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도는 자신의 믿음의 부족함에 늘 직면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게 “은혜” 베푸셔서 나를 “구원”하셨는데도
나는 과연 그 “은혜”를 받은 자답게, “구원” 받은 자답게 살고 있는가 하는 자문에 늘 대면하기 때문이다.
성도가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구원” 받은 자답지 못한 자에게 그 “은혜”는 마치 헛된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대신” 죽으심으로 베푸신 “구원”은 나를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고자 하심이지,
석방되었지만 여전히 범죄를 일삼고 사는, 단지 교도소 밖에 있기만 하면 되는 자로 되게 하심이 아니다.
그러면 “구원”의 그 큰 “보배”가 얼마나 가치 없는, 헛된 것이 되는 것인가!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 말씀은 예수를 평생 동안 끝까지 믿을 모든 성도에게 유효하다.
특히 나에게는 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