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4:1-22, 곤고한 자가 곤고한 자들에게)

이 시는 그 배경이 설명되어 있다.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가드(블레셋)로 몰래 피신하려 했으나
아기스(아비멜렉) 왕이 그가 누구인지 알아차리자
“미친 체”하여 결국 위기를 모면하고 가드를 빠져나간 사건이었다.(사무엘상 21:10-15)
다윗은 사방에서 적을 만난 것이고 모두에게 쫓기는 신세였다.
이 위험한 상황에서 겨우 벗어나 다윗은 이 시를 썼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출해주신 것에 대한 감사와 찬송의 시였다.
그리고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나누며 같은 상황의 성도들에게 힘을 준다.

그는 “곤고한 자”였다.
이스라엘과 그 왕을 위해 목숨을 걸고 ─어린 소년으로─ 나가 싸워 승리를 안기고
이스라엘과 그 왕을 위기에서 구하게 한 다윗을
왕은 결국 시기하고 증오하기에 이르고 그의 원수가 되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쫓기고 있었고 그가 물리쳤던 적국으로까지 몰래 피신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거기서 신분을 들키자 그는 또 도망쳐야 했다.
그는 원수를 피하여 도망을 갔더니 또 다른 적을 만나 피해야 했다.
그는 진정 어디로 누구에게로 피해야 하는가?
이 시에서 다윗은 “그에게 피하는 자”였다고 말한다.
“그”는 누구인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다윗은 이 절박한 순간에 ─피난처가 될 줄로 알고 들어온 가드에서 도리어 발각되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는 가드 왕 앞에서 “미친 체”를 하는 순간에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다.
그는 “곤고한 자”로서 “부르짖”었다.
그 짧은 순간에 ─그 순간이면 가드 왕이 다윗을 사로잡으라고 명령을 내릴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짖음”을 들어주셨다.
그리하여 그 순간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고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셨고, 그를 “구원”하셨다.

다윗이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는 그 순간
그는 자신의 연기에 가드 왕이 속아 넘어가기만을 바란 것인가?
그는 변신과 위장과 임기응변에 능한 특기를 발휘한 것인가?
세상의 처세술은 그렇게 평가할지 모르지만,
그의 진실은 오직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가 자신의 술수로 위기를 빠져나왔다면 그는 하나님께 찬양하고 감사할 것이 없다.
그는 자신의 연기의 비법을 자랑하고 전수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를 자랑”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곤고한 자”를 어떻게 살려주셨는지 고백한다.
그의 고백에서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라고 하는 것은,
그가 그 “미친 체”하는 순간에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충심으로 통회”하였음을 암시한다.
아마도 그는 사울에게 쫓겨 또 다른 세력─사울의 적인 블레셋─에 의지하려 했던 자신의 책략에 마음이 상했을 것이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방책이었던 것을 “통회”했을 것이다.
그 짧은 순간 그는 다음 전략을 짜기 위해 머리를 굴리느라 시간을 끈 것이 아니라
가장 진실한 순간을 맞는다.
바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상한 마음으로 통회하고 곤고한 채 부르짖었다.
그는 하나님을 두려워─“경외”─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셨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는 어떤 시간도 짧지 않다!
그 진실한 시간을 위해서는 어떤 시간도 가능하다!

그리고 이제 그는 이것을 “곤고한 자들”에게 나눈다.
“곤고한 자”였던 다윗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곤고한 자들”에게 “자랑”한다.
이 “자랑”은 듣는 이를 기죽이고 모멸하는 차별전략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자랑이 자기를 높임으로써 상대방을 낮추는가.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를 자랑”하며, 하나님을 높인다.
그리하여 그는 “곤고한 자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게 하며 그들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는 일을 한다.
그의 부르짖음을 들으신 하나님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실 것이라고 확신시킨다.

다윗은 이 시에서 결코 자신을 중심에 놓지 않는다.
중심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는 “곤고한 자들”, 곧 “너희 성도들”을 그 중심으로 초대한다.
그것은 결국 그들을 중심으로 섬기는 행위다.
그는 손님을 주인에게로 안내하는 종의 직분을 수행하고 있다.
이것이 하나님이 중심인 자의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