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5;11-21, 대신하여 위하는 화목)

세 단어가 오늘 본문에서 여러 번 반복되고, 그것이 내용의 핵심을 이룬다.
“대신하여”, “위하여”(“위한”), “화목”.
그리고 각 뜻이 서로 연결된다.

1) “대신하여”:
①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다.
그것을 좀더 자세히 풀어 쓰면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예수)를 우리(죄인)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이다.
죄의 결과는 사망이므로 죄인인 우리가 죽어야 하는데
죄가 없으신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그 죗값을 치르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다.
이것이 복음이요 구원이다.
②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된다.
본문에 “우리”는 우선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다.
그들은 예수를 “대신”하는 “사신”이 되었다.
“사신”은 누구의 뜻을 “대신” 전하는 자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사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권면하실 것을 사도들이 우리에게 “대신” 전한다.
그 “권면”은 죄의 지적, 회개의 촉구, 용서의 선언, 위로, 격려, 사명의 부여 등 때마다 다양한 내용으로 이루어진다.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간청”을 사도들이 고린도 교인에게 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신”인 것과 같이 모든 성도가 다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신”이다.
“사신”은 말씀을 그에게 전해준 자와 그가 그 말씀을 전해줄 자 사이에 있다.
사도들이 하나님(그리스도)과 고린도 교인 사이에서 “사신”의 직분을 감당했고, 그것이 계속 이어진다.
물론 그 이후의 모든 “사신”이 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이므로
모든 “사신”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 다음 세대(의 세상과 성도) 사이에서 그 말씀을 전하는 자다.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복음의 “사신”이다.

2) “위하여”:
“위하여”는 “대신하여”와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신하여”가 행위의 근거와 권위의 출처라면 “위하여”는 행위의 목적과 권위의 귀결이다.
성도가 “사신”의 사역을 감당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대신”하기 때문이요, 사실은 그 “사신”의 직분을 그리스도께서 주셨기(위임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는 누구를 “위하”는가?
① 성도는 “하나님을 위한(위하는)” 자다.
그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며, 그가 사신으로서 사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함이다.
성도는 무엇을 해도 “하나님을 위한”다.
설령 복음을 전하고 희생적으로 사랑하고 고난을 받는 것이 세상에서 보기에 미친 것으로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 미친 것이다.
탐욕의 죄에 중독되어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그것에 미친 자는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하여 미친 자다.
그러나 성도는 “하나님을 위하여” 미치든지, 정신이 온전하든지, 높아지든지, 낮아지든지 한다.
그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은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것과 반대된다.
물론 성도는 “하나님을 위하여”서만 “자신을 위하”는 자다.

② 사도들은 고린도 교인들을 “위한(위하는)” 자였다.
사도들에게는 “하나님을 위한(위하는) 것”과 “너희를(성도들을) 위한(위하는) 것”이 동일했다.
“하나님을 위한” 미친 짓이 “너희를 위한” 미친 짓으로 나타날 때 그것은 동일한 의미다.
“하나님을 위하여”서라면 ‘성도를 위하여’서 얼마든지 미친 짓도 할 수 있고,
우스꽝스러운 자로 여겨질 수 있고 또는 높여질 수도 있다.
“사신”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하나님 말씀을 전할 때
그는 이미 그 말씀을 듣는 자를 “위하는” 자이며 그를 “위하여” 어떠한 자기희생도 감수하는 자다.

3) “하나님과 화목하라”:
“대신”이나 “위하”는 것이나 사실은 모두 하나님께서 먼저 하셨다.
예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셨고,
그것은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대신”하시는 것도 “위하”시는 것도 하나님(예수)께서 먼저 하셨다.
① 그리고 그렇게 하신 행위 자체가 곧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신 일이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께 원수로 되었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하나님)와 화목하게” 하셨다.
“화목”도 “대신”과 “위하여”와 같이 하나님께서 먼저 하신 일이다.
하나님께서 원수인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다.
나는 여전히 죄가 많아 하나님께 송구스럽지만,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모시며 나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해주시기를 간구한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화목의 중대한 한 모습이다.
내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② 그리고 하나님은 사도들을 통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우리에게 “간청”한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사도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셨다고 선언하면서
더 나아가서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 강조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면
이제 나는 세상이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보내심을 받은 하나님의, 즉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사신”이다.
나는 세상에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간청”하는 “사신”이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은 ─본문에서는 직접 언급하고 있지는 않지만─
당연히 성도들 사이는 물론이고 세상의 모든 사람과 화목한 것까지 포함한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로마서 12:18)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우리를 “위하”신 그의 사랑이었고 우리로 “하나님을 위한” 자로 만드시려는 뜻이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심은 원수인 우리와 “화목”하시려는 뜻에서였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과 화목”한 자가 되는 것이다.
“대신”과 “위하여”와 “화목”은 이렇게 이어진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그러하며, 또한 내가 성도들과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러하여야 한다.
“대신”의 반대는 ‘전가’이며, “하나님을 위한”의 반대는 “자신을 위하여”이고, “화목”의 반대는 원수로서의 ‘불화’다.
즉 남에게 전가하고 자신을 위하는, 원수 맺는 자다.
대신하여 위하는 화목과 얼마나 다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