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6:1-12, 하나님 앞에 완전함이란)

다윗은 이 시를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라는 고백으로 시작한다.
이것은 하나님께 아뢰는 말씀이다.
그는 지금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완전함”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시의 맨 끝에서도 반복된다.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완전함”, 이 완전한 말을 감히 하나님 앞에서 쓸 수 있을까?
다윗은 어떤 뜻으로 “완전함”을 말하는 것일까?
흔히 “완전함”에 대해 바로 떠오르는 것은 예수님의 비유(누가복음 18:9-14) 가운데 바리새인의 기도 내용이다.
‘나는 일체의 죄를 짓지 않았고 일체의 율법을 다 행했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모든 선과 의를 행한 것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다윗의 고백이 이러하다고 볼 수는 없다.

우선 그가 말하는 자신의 행위는 이미 행했다는 과거형보다는 앞으로 행하기를 바라는 미래형 동사 구문으로 대부분 표현되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완전함”의 내용이다.
그 안에는 바리새인의 고백과 같은 행위도 포함된 것이 있다.
그러나 거기에 포함되지 않은 중요한 것이 더 있다.
그는 “여호와를 의지하였”으며, 하나님께서 “살피시고 시험”하셔서 그의 “양심을 단련”받기를 원한다.
바리새인의 완전함은 죄가 없고 할 것을 다 행했으므로 더 이상 하나님께 “의지”할 것이 없는 “완전함”이다.
그는 기도에서 자신의 “완전함”을 하나님께 보고할 뿐이지
사실상 하나님과의 관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에 반해 바리새인이 볼 때 죄투성이인 세리는 오히려 하나님을 “의지”한다.
그는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하고 아뢴다.
그는 자신이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기를,
즉 용서의 은혜를 베푸시기를 간구한다.
그는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한다.
이에 반해 바리새인은 자신의 “완전함”을 “의지”했다.

다윗은 마지막에 “완전함에 행하오리니”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속량”과 “은혜”를 간구한다.
“속량”은 ‘죄를 대신 씻어주는 일’이다.
즉 다윗은 자신에게 죄가 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바리새인의 “완전함”은 “속량”도 하나님의 “은혜”도 필요 없다.
그의 “완전함”은 마치 하나님의 기준을 만족시킨 것 같지만 오히려 그 결과로 하나님이 사라지게 된다.
아마도 세상이 상정하는 “완전함”이 이와 같을 것이며 바로 그것은 모순에 직면한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완전함”이란 결국 하나님 앞에 ‘불완전함’일 뿐이다.

이것은 죄가 있어야 죄를 용서받을 일이 있게 되고 죄 용서를 위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므로
죄를 많이 지을수록 더 완전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결코 아니다.
다윗은 “허망한 사람”, “간사한 자”, “행악자”와 같이 살지 않을 것이다.
그는 “무죄”한 자로 흠 없이 살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최선을 다해 죄를 멀리하고 선을 행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할 것을 빌미로 죄를 함부로 지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죄를 짓지 않으며 선을 행할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 계속 자신을 “살피시고 시험”하시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그의 “뜻”과 “양심을 단련”하시기를 간구한다.
그는 자신의 뜻과 마음이 더욱 “단련”받아야 할 정도로 아직 온전하지 않은 것을 안다.
그는 이를 위해 계속 하나님을 “의지”한다.
하나님께서 “단련”시켜주심을 “의지”한다.
그의 힘으로 죄를 안 짓고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그는 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의 “완전함”이란 바리새인과 같은 하나님이 필요 없는 완전함이 아니라
─그건 완전함이 아니며 그런 완전함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의지할 필요 없는 자는 결국 자신만을 의지하는 교만함에 빠진다─
죄인으로 하나님 앞에서 “속량”과 “은혜”를 간구하며 “의지”하는 자다.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여 죄를 짓지 않으려 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여 구원을 받으며
하나님을 “의지”하여 선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의지”함으로써만 되는 것을 그는 안다.

예수께서는 두 사람의 기도의 비유에서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하나님을 “의지”하는 세리)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선언하신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도 말씀하시는데,
바로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와 “의지”하지 않는 자의 차이가 여기서 나타나고
그것이 영원을 가른다.
나는 오로지 하나님을 “의지”하여 “완전함”을 사모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