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3:1-13, 믿음 안에 있는가 시험하고 확증하라)

바울은 이 편지에서 특별히 자신에 대한 비난 문제를 많이 다루었다.
의사소통의 착오에 대해서는 사정을 설명하여 오해를 풀었다.
그러나 심각한 문제도 있었는데 그것은 잘못된 기준에 의한 판단과 비난으로 바울의 사도직에 의심을 제기한 경우였다.
이것이 육신적인 외모에 의한 비교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에서 바울 사도는 그 기준이 잘못되었음을 핵심적으로 지적했다.
오직 복음 전파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은 인간의 육신적인 강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약함에서 나타난다고 강조한다.
그러므로 자랑할 것이 있다면 자신의 약함을 자랑해야 한다.
그것은 사실 나의 연약함을 자랑하라는 말보다는
그렇게 해서 복음이 전파되고 하나님께서 높여지시는 것을 자랑하라는 것이다.
실제로 육신적인 강함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할 때
언제나 자신이 높아지는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반드시 시험에 들고 만다.
예수님도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박히셨”고,
그 순종으로 복음을 통한 구원이 나타나고 그럼으로써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

그러나 더욱 심각한 것은 바울을 모함하고 파렴치한 범죄자로 배제하려는 악의적인 술수다.
그가 속임수로 재물을 갈취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근거 없는 비방으로,
고린도 교회를 깨뜨리는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이라는 범죄에 해당된다.
그리고 바울은 세 번째 방문에서 이 문제를 ─이들을─ 단호하게 대할 것이다.
그것은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다.
만일 회개하지 않는다면 “용서하지 아니” 할 것이다!
그의 입에서 나온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는 말은 사도에게 적합한 말인가?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죄를 범한 형제를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라고 여쭈었을 때에
─그는 자신의 관용의 한계가 매우 넓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라고 부언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대답하셨다.(누가복음 18:21-22)
그것은 무한대의 용서를 하라고 하신 말씀이다.
바울은 ‘겨우’ 세 번의 방문으로 잘못된 교인들을 “용서하지 아니” 해도 되는 것인가?
그러나 누가복음의 말씀은 이미 앞에서 ‘죄를 범한 형제’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를 말씀하신 것의 연속된 내용이었다.
먼저는 개인적인 권면으로 시작하고, 그 다음에는 두세 증인을 통해,
최종적으로는 교회적으로 다뤄야 한다.
여기서 그 다음 단계로 이행하는 여부는 그가 이 권면을 듣는가 듣지 않는가에 달려있다.
그것은 곧 회개의 여부다.
예수님의 말씀은 죄를 범한 형제를 그냥 용서해주라는 것이 아니라
‘그가 들으면, 즉 회개하면’ 몇 번이고 용서하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 같은 ‘회개 없는 용서’, 즉 ‘보편구원’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바울은 세 번째 방문에서 이 사안을 해당 형제들에게 다시 말할 것이며
또 듣지 않는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적 차원에서 권징으로 시행될 것이다.

이것은 소수의 적극적 반대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
누구도 모든 사안에서 죄를 범할 수 있다.
그러므로 참으로 깨어서 조심해야 한다.
바울 사도는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모든 교인에게 촉구한다.
내가 믿음 안에 있는가?
이것은 이 문맥에서 나의 문제─죄─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루고 있는가의 문제다.
즉 죄를 회개하는가?
그렇지 않으면 믿음 밖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의 죄를 다룰 수 있는 곳은 오직 예수 “안에”서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믿음 안에 있는지,
즉 죄를 예수님 안에서 회개와 용서로 다루고 있는지 “시험”해야 ─잘 살펴야─ 한다.
이것을 살피지 않으면 내가 예수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 무심하게 산다는 뜻이다.
그리고 “시험”하라는 것은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결국 믿음 안에 있음을 “확증”하라는 명령이다.
“자신을 시험”하는 가운데 내가 죄가 있는지,
그것을 믿음 안에서 ─회개함으로─ 다루고 있는지 드러날 것이다.
그 여부를 드러내는 것이 “시험”이다.
그리고 이제 “확증하라”는 뜻은 무엇인가?
믿음 안에 확실히 있으라는 요구다.
즉 죄를 예수께 회개하라는 뜻이다.
나의 죄를 드러내시는 성령의 감화에 ‘듣는 것’이다.
듣는 반응은 곧 회개로 이어진다.
듣기를 거부하면 내가 그 문제를 예수 밖에서 처리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결과는 “용서”의 밖에 거하는 것이다!

믿음 안에 있는지의 “시험”과 “확증”이 곧 나를 “진리”로 이끈다.
이럼으로써만 나는 “온전하게” 된다.
바울은 세 번째 방문에서 고린도 교인들을 믿음 안에, 예수 안에 있음을 “확증”하고
그리하여 그들을 “온전하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을 이미 주께서 하셨고 사도들이 재현하며 그리하여 오늘날 나도 그 귀한 믿음 안에 있게 된 것이다.
내가 참으로 나의 죄를 늘 살피며 회개하기를 진실하게 하시는 “성령의 교통하심”에 감사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