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5:1-10, 주께서 기쁘시게 하는 자에서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로)

어제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성도를 ‘보배를 그 속에 가진 질그릇’으로 비유했다.
그것은 우리의 속사람과 겉사람의 대조를 보여주며, 무엇이 정말로 중요한지를 가르쳐준다.
나는 나의 초라한 “겉”으로 절망하지 않고 내 “속”의 보배로운 영광을 인하여 감사하고 거기에 삶의 의미와 사명을 둔다.

오늘 본문은 이 비유와 연결되어 있지만 더 깊은 진실로 나아간 것 같다.
우리가 마냥 “보배”를 품은 “질그릇”으로 머무르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가장 나쁜 것은 속에 악독한 것이 가득 한, 또는 속이 텅 빈 그릇이다.
그릇은 무엇을 담기 위한 도구이므로 그릇의 재질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진 내용에 의해서 그릇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그 안에 “보배”가 들어있는 그릇이 좋은 ─보배로운─ 그릇이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그릇의 재질이 낡아진다는 사실이다.
이 땅에서의 그릇은 모두 한시적인 수명에 종속된다.
“질그릇”이 점점 낡아지면 어떻게 되는가?
오늘 말씀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새 포도주와 새 부대’의 비유로 이어지는 것 같다,
“새 포도주”를 위해서는 낡아서 새는 헌 부대가 아니라
그 귀한 포도주를 잘 보관할 수 있는 질 좋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헌 부대가 새 부대로 바뀌어야 한다.
그 일이 성도에게 분명히 일어난다.

“질그릇” 같은 우리의 “겉사람”, 즉 우리의 몸과 죄성에 젖은 성품들은 죽음과 함께 완전히 허물어진다.
그것은 바울이 비유하는 바 결국 무너지는 “장막 집”과, 역시 결국 해어져서 사람을 벌거숭이로 만드는 ‘낡은 옷’과 같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장막 집” 다음에 “하나님께서 지으신 ···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있다.
‘낡은 옷’으로 인해 “벗은 자”로 되는 자에게 “덧입”히는 ‘영원한 새 옷’이 있다.
이 땅의 “장막 집”과 ‘낡은 옷’은 죽음으로 완전히 해체된다.
그것은 더 이상 “질그릇”으로도 기능하지 못한다.
그러면 그 안에 “보배”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질그릇”을 완전히 새 것으로 변형하신다.
바로 ‘부활’이다!
예수께서 죽은 뒤에 부활하신 사건이 이미 그것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예수의 몸도 역시 창에 찔리고 십자가에 못이 박히면 숨이 끊어지고 생명의 작용이 중단되는,
그리하여 며칠 지나면 부패되기 시작하는, 더 이상 생명체가 아니라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물건’으로 취급되는 “장막 집”이요 ‘낡은 옷’이었다.
그러나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었다.
예수님의 부활하신 몸은 바로 “하나님께서 지으신 ···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다.
우리도 바로 그와 같이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보배”를 품은 ‘귀한 그릇’이 된다.
“새 포도주”를 담은 “새 부대”가 된다.

죽음은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모든 것을 잃게 하여 허무와 절망으로 빠뜨린다.
예수 없이, 예수 밖에서 죽음을 통해 무엇을 얻게 되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는 이미 그 안에 “보배”가 없는 자였고,
그나마 각종 세상의 기준으로 채색되고 미화된 “질그릇”마저 깨지고 무너지고 사라지면서 그는 모든 것을 잃는다.
─아! 그를 기다리는 것은 심판이다─
그러나 성도는 그 “보배”가 여전히 있고, 그의 “질그릇”도 ‘귀한 그릇’으로 바뀐다.
그는 이제 “보배”를 품은 보배로운 귀한 그릇이다!

그 과정은 당연히 성도에게 감사하고 기쁘고 영광스러운 사건이요 순간이다.
아니 그 순간 이후로 영원히 그러할 것이다.
그러면 성도는 오직 그 날만을 기다리며 살 것인가?
즉 나의 “장막 집”이 무너지고 ‘낡은 옷’이 벗겨질 날만, 즉 죽을 날만 기다릴 것인가?
죽은 뒤에 부활이 오므로 이 기대와 소망은 타당하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말하는 듯하지만 실제로 더 중요한 진실을 고백한다.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 있든지”,
즉 “질그릇”이 깨지고 사라지든지 ‘보배로운 귀한 그릇’으로 바뀌든지,
즉 죽든지 부활하든지, 바울 사도가 다른 데서 말한 대로 “살아도 ··· 죽어도” “사나 죽으나”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 땅의 “장막 집”에 머물러 있을 때에도, “부활”한 새 몸을 입고 나서도
성도에게는 더욱 고귀한 목표와 의미와 기준이 있다.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역시 바울 사도가 다른 데서 말한 바와 같이 “주를 위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점점 ‘후패’해지는 낡은 “질그릇”으로 사는 것보다
아무렴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입고 그 보배로운 그릇에 “하나님의 영광”의 “보배”를 품고 산다면 얼마나 기쁘고 영광스럽겠는가!
그것은 당연히 성도의 간절한 바람이요 소망이요 기도제목이요 성도의 분명한 미래 사실이다!
그러나 나의 몸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이것은 살고 죽는 것뿐 아니라,
이 땅에서라도 평안하거나 고통스럽거나 건강하거나 아프거나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를 막론하고를 의미한다─
나는 “주를 기쁘시게” 할 수 있다.
나는 지금 연약해도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로 살아야 하며 살 수 있다.
그러한 자로 사는 것이 성도의 본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