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1:1-9, 헛된 연합, 헛된 이름)

어제 본문에 나오는 노아의 세 아들의 족보는
앞에 기록된 두 족보와 달리 장소가 강조되었고,
그것은 생육과 번성을 넘어 “각기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
“온 땅에 퍼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땅에 충만”하는 것은 “창조되던 날”에 주셨던 “복”으로서
아담과 하와의 첫 불순종에도 가인의 형제 살해로도
홍수 심판에서도 결코 축소되거나 폐기되지 않은 약속이요 명령이다.
하나님은 죄를 지은 인간들을
지하에, 토굴 속에, 황폐한 오지에 가두지 않으셨다.
“땅에 충만”하는 “복”을 파기하고
‘벌’로서 정반대의 감금을 명하는 일을 행하지 않으셨다.
인간은 죄인이지만 땅에서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다.
그 자유로 인해 “온 땅에 퍼지”는 일을 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복을 감사히 여겨
그 명령을 준행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 “복”은 약속으로서는 이루어졌지만,
명령으로서는 준행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은혜로우시며,
인간은 고집스럽고 어리석다.

인간은 그 이상이었다.
이들은 거대한 기획을 추진했다.
어마어마한 사업이었다.
하늘에 닿을 첨탑이 있는 초대형 도시를 짓는 것이다.
이 일의 목적은 “우리 이름을 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도 또 하나의 목적이었다.
글자 그대로는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려는 것이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 듯이 보일 수도 있다.
생육과 번성의 결과로 인구가 늘면
아무리 거대한 도시를 중심으로 대제국을 건설하여도
그 면적은 늘어날 수밖에 없고,
흩어지지 않으면서도 계속 그 지경이 넓어지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더욱 확실한 목적으로 인해
그들의 모든 의도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확실한 잘못은 바로 “우리 이름을 내고”다.
이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홍수 심판의 기억도,
노아 방주의 구원에 대한 감사도,
가인의 범죄와 아담의 불순종의 비극에 대한 경성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이들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 똘똘 뭉치는 데 골몰한다.
설사 이 일을 모두가 원해서, 합의하여 하는 일이라 해도
이 거대한 사업을 추진하는 데에는
당연히 강제와 착취와 억압이 따른다.
이 대제국은 소수의 지배층을 위한 나라가 될 것이 뻔하다.
이것이 “우리 이름을 내고”의 진상이다.
그리고 인류 역사의 본질이기도 하다.

흩어짐을 면하고자 하는 생각은
이들이 모두 노아의 자손이므로 같은 혈통, 언어를 가지고
―아직은― 같은 지역에 살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연합과 단결을 꾀하는 것이다.
연합과 단결,
이것은 얼마나 좋은 단어인가!
그러나 잘못된 목적을 위해 하는 대동단결이란
결코 정당하지 않다.
이들은 헛된 연합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자신들의 힘을 과시하려는 교만한 연합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패역한 연합이다.
그러한 잘못된 연합으로는
그 구성원 하나하나를 존중하는 일도,
만물을 관리하고 다스리는 일도 결코 잘 할 수 없다.
무지막지한 전체의 힘은 억지로 모을 수 있겠지만
그것은 둘이 한 몸이 되고,
동물에게 이름을 짓고,
뒷걸음쳐 치부를 가려주는 배려의 진짜 힘은 끌어내지 못한다.
“우리 이름”으로는
하나님의 그 아름답고 선하신 뜻을 조금도 이루지 못한다.

“우리 이름”은 사실 ‘자기 이름’, ‘내 이름’으로 시작한다.
‘자기 이름을 내려고’ 하는 것,
만일 그 목적이 이루어지면 그 결과는 교만일 뿐이다.
더 문제가 되고 무서운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표방한 ‘자기 이름’이다.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속내는, 결국은 자기를 높이는 바로 그것,
아! 나에게 참 흔하고 고치지 못하는 그것!

이들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이 일을 계획했다.
만일 그곳이 비옥하지도 광활하지도 않았다면,
그들이 협곡을 지나며 물과 초지를 찾아 더 나아가야 하는 곳에 있었다면
그런 도모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비옥하고 광활한 평지는 감사한 장소이지만
참으로 조심하지 않으면 죄 짓기 쉬운 곳이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즉시 내 이름만 생각할 장소다.
나는 차라리 결핍한 환경에 있기를 더 좋아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