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0:1-32, 온 땅에 퍼지니라)

창세기에 벌써 여러 번 족보―또는 계보―가 언급된다.
가인의 후손 명단,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계보,
그리고 오늘 본문의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가 그것이다.
그런데 앞의 두 기록에서는
앞 세대의 대표적인 아들―아마도 장남―이 다음 세대의 아들을 낳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래서 가장 많이 쓰인 것이
“낳(았)고”―“낳았으니”, “낳으니라”, “낳은 후” 등등―라는 단어다.
아담에서 노아에 이르는 ―가인과 달리 셋의― 계보는
각각 몇 년을 살았는지가 더 첨가되었다.

이에 비해 오늘의 족보는 기록 형식이 조금 다르다.
‘누가 누구를 낳았다’가 아니라
‘누구의 아들은 누구다’ 식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누구의 아들은 누구, 누구, 누구 ···다’라는 문형으로 기록된다.
즉 각 세대에서 한 사람의 이름만 대표로 언급된 것이 아니라
여러 이름이 나오는 것이다.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일곱 아들 이름이 기록되었다.
그리고 첫 두 족보와 달리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지명을 기입하고 있다.
야벳의 자손은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고,
함의 경우에는 상당히 많은 지역의 이름―“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들이 나열되며,
셈의 후손에 대해서는 “메사”, “스발” 정도만 언급된다.
지명의 수에 관계없이 노아 세 아들들의 족보는
이들이 모두 “각기 언어와 종족과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로 마친다.
더 정확히 말하면 “··· 나라대로” “머물렀더라”,
즉 살게 되었더라, 또는 퍼졌더라는 뜻이다.

즉 앞의 족보들이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날에 주신 복의 “생육”과 “번성”에 중점을 두었다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생육과 번성과 더불어 “땅에 충만”하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어제 말씀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방주에서 나온 ···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세부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노아 홍수 이전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 살았으므로
이들이 사는 지역은 당연히 확장되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홍수의 심판으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셈이 되었지만
―즉 인구수뿐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한 지점으로―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해 그 후손들이 어떻게 이전보다 훨씬 더 넓은 지경으로 퍼져나가는지,
그리고 그들의 단위가 이제 “종족” 및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특히 “나라”로 확대되는지를
오늘의 족보는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죄와 그에 대한 심판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이후의 새 출발에서도 이전과 다르지 않은 인간 세상의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인간이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도록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다.
그 약속과 복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복”이다.

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감사하고,
또한 하나님께서 이렇게도 신실하게 이루시는 “복”인 생명의 중요성을 알고
사람들을 정말로 편견으로 판단하지 않고
하나님의 선물로 더욱 귀중히 존대해야 할 것이다.

(어제(1.12) 우리 교회는 성서유니온의 강사로부터 매일성경 묵상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아주 작은 교회이지만 감사하게도 우리는 10여 년째 교인들이 매일성경으로 묵상을 하고 일요일 오후에 교회에서 각 부서마다 금요일치 ‘그룹큐티나눔’을 하고 있습니다. 강사는 묵상에서 무엇보다 성경을 잘 읽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질문으로 경각심을 일깨웠는데, 바로 며칠 전의 묵상 본문을 얼마나 정확히 읽었는지를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땅과 하늘의 짐승이 어떻게 창조되었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 말씀으로’라고 대답했는데 정답은 “흙으로”(2:19)였습니다. 저의 부주의함에 대한 부끄러움은 더욱 컸는데, 그것은 제가 1월 3일치 묵상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설명하면서 짐승들과 사람의 창조방법이 ―말씀으로냐, “흙으로냐”― 차이가 나는 듯이 썼기 때문입니다. 종종 있듯이 이 부분도 시정해야 할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