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9:18-29, 밖으로 나간 함)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은 세 명이었고, 각각 부인이 있었으므로
여섯 명의 부부가 이제 인류의 새 조상이 된다.
그리고 이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는 일이 벌어진다.
그것은 상당히 시간이 걸리는 일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생육과 번성과 충만으로 이루어지며 그것을 이루어간다.

그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던 날에” 주신 “복”이
노아 홍수 이후에도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참으로 놀랍다.
그 홍수의 심판에서 방주 밖의 모든 사람이 죽어 사라지는 비극이 있었음에도,
인류는 다시 불과 여덟 명으로 ─가임 여성을 기준으로 한 다면 단 세 명으로─
아기가 태어나고 가정이 이루어지고 분가하고 개척하며 이주하고
더욱 더 넓은 범위로 확대되는 일이 계속된다.
이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 과정은, 아니 그 시작은
전적으로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실수가 있었고 죄 짓는 일도 일어나고 저주받을 사건도 벌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불행이 “온 땅에 퍼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재현될 것이다.

비극은 방주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시작되었다.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다.
오늘날의 농법으로 씨를 뿌려 포도를 재배하면 4~5년 지나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데
아무려면 그 당시는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지만,
그 이후의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기 시작하는 때에 비하면
─노아는 그의 아들들과 아직 한 곳에 살고 있다─
아주 이른 시기라 할 수 있다.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벌거벗은 것은 “장막 안”에서였다.
술에 취하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일을 할 정도의 상태가 된 것 자체가
아비의 실책이라 할 수 있지만,
그 일이 “장막 안”에서 일어났으므로 더 이상의 문제를 야기할 일은 아닐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잠든 몇 시간 동안에
최초의 불미스러운 일을 훨씬 넘어서는 비극이 발생한다.
성경은 함의 행동과 셈과 야벳의 행동을 짧지만 매우 대조되는 표현들로 설명함으로써
사건의 전말을 충분하게 알린다.
한 사람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알리”는 일을 했고,
두 사람은 “뒷걸음쳐 들어가” 가지고 온 “옷”으로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얼굴을 돌이키고”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다.

최초의 행동은 차이날 수밖에 없다고 할 것이다.
함이 어쩌다 아버지의 장막에 들어갔다 하여도
그는 우연히 벌거벗고 누운 아버지가 눈에 띄었을 것이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을 수 있다.
이에 반해 셈과 야벳은 이미 사태를 들었으므로
모든 것을 준비하여 최대한으로 실수하지 않도록
그들의 시선을 특별히 주의하여 장막에 들어가고 수습하고 나왔다.
그들은 들어갈 때부터 나올 때까지 아버지의 하체를 보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만일 함이 아니라 셈이나 야벳이라도
처음으로 아버지의 장막에 들어간 사람이라면 어쩔 수 없이 못 볼 것을 보는 일이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이 중요하다.
여기서 차이가 크게 났다.
가장 큰 차이는 이 사태를 형제들에게 알린 ─떠벌인─ 것과,
이것을 더 이상 아무도 모르게 신중하게 해결한 데에 있다.
함은 참으로 생각이 없었고, 셈과 야벳은 참으로 생각이 깊었다.
세 사람의 표정이 충분히 상상이 된다.
함은 뭔가 자기만 아는 비밀을 주체할 수 없어 흥분하여, 분명 즐겁게 떠들었을 것이고,
셈과 야벳은 침통한 표정에 묵묵히 그러나 신속하게 무엇을 해야 할지 골똘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차이의 기로는 장막 안의 광경을 최초로 보았느냐 아니냐에 있지 않다.
함의 행동이 문제가 되는 것은 그가 장막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시작한다.
그는 최초의 목격자로서 설사 아버지의 하체를 가릴 때까지
그 광경을 계속 볼 수밖에 없게 될지라도
그가 ‘장막 안에서’ 그렇게 처리를 했다면 그는 잘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조처를 취하지 않고 밖으로 나갔다.
그가 밖으로 나간 이유는 형제들에게 알리기 위함인데
이것은 어떻게 해야 할지 조언을 구하기 위해서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결국 떠벌인 것이고, 아마도 두 형제들도 가서 구경하라고 부추기는 것까지 한 셈이다.
“밖으로 나가서”라는 표현에 이러한 뜻이 다 들어있을 정도로
그는 그렇게 행동했다.

이에 반해 두 형제는 ‘장막 안에서’ 사태를 수습했다.
이 문제가 밖으로 나가지 않게 했다.
그것은 아버지의 명예와 관련되는 일이고
안에서 간단히 덮어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이상의 지혜를 발휘했다.
설사 그 일을 하는 동안 그들의 시선이 아버지의 치부로 향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것은 책임질 일이 아닐 것이나,
그들은 장막 안에서조차 일체의 실수가 없도록 최대한으로 신중하게 행동했다.
그것은 참으로 지혜롭고 이해심 많은 배려였다.
그것은 아버지를 공경하는 자녀의 마음이다.
그것은 아버지뿐 아니라 분명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마음까지도 반영한다.
누군가의 치부를 드러내지 않고 신중하게, 아무도 모르게 덮어주는 것은
그를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자로 여긴다는 증거 아닌가.

내가 함에 대해 신랄하고 셈과 야벳의 현명함이 참으로 부러운 것은
실수에 대한 나의 태도가 함과 같기 때문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지혜롭게 생각하는 데는 느리고,
그 짧은 순간에도 어리석은 결정을 하는 데는 매우 빠르다.
나의 입은 무거운가?
남의 말을 하고 싶어 근질근질 거리지 않는가?
나는 밖으로 나가는가, 안에서 조용히 돕는가?
내가 최근에 마주하는 문제에 이 말씀은 분명한 답이다.
문제는 순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