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3:1-17,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드디어 진군이다.
애굽에서 나온 후 홍해를 건너 광야로 들어와 40년을 지내다가
요단강 동편을 따라 여기까지 왔다.
그리고 이제는 강을 건넌다.
강 저편에 가나안 땅이 있다.
드디어 출애굽의 목표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40년 동안의 여정은 대체로 평화의 시기였다.
전쟁은 거의 없었고 ―약간 있었고―
농사도 짓지 않은 채 하늘에서 공급되는 음식으로 지냈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정착이 목적인데,
이미 사람들이 ―일곱 부족이― 살고 있고,
그들의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하도록 사무치므로
그들은 결코 그 땅을 이스라엘에게 호락호락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정착은 곧 정복의 형태로 진행될 것이며
그것은 전쟁을 전제한다.
가나안 진군은 곧 이스라엘이 싸우러 가는 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외형상 전혀 군사적 행동을 하는 것 같지 않다.
무엇보다 행군의 순서가 중요하다.
맨 앞에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나아갈 것이다.
그 뒤에 한참 ―2000규빗, 즉 약 800미터― 떨어져 백성들이 따라간다.
그들 손에는 무기가 없으므로 사실 그들은 군대가 아니다.
이스라엘은 진군하는 것이 아니라
지난 40년 동안 해왔던 것처럼 이동을 하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이스라엘은 원래 광야에서 열두 지파를 넷으로 편성하여
앞에 두 무리, 그 다음에 성막, 그 뒤에 나머지 두 무리가 행진했었다.
그때 성막은 행진을 할 때나 한 곳에 머물러 진을 칠 때나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중심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가나안에 들어서는 순간에는
언약궤가 맨 앞에 위치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도를 의미할 것이다.
가나안은 이들이 알지 못하는 땅이다.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던 곳이다.
그러나 이들이 가는 길을 아는 방법이 하나 있다.
딱 하나 있다.
언약궤에 거리를 두고 그 뒤를 따라가는 것이다.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배치와 이동은 하나님의 명령이었다.
“보라 온 땅의 주의 언약궤가 너희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나니”
“살아계신 하나님이 너희 가운데 계시사”
이들을 인도할 것이다.
그리고 가나안의 모든 부족을 쫓아내고
그 땅에 정주할 것이다.

앞에 강이 흐르고 그 강은 마침 곡식 거두는 시기여서 언덕에 넘치고 있다.
당연히 우회로를 찾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강에 발을 담그자
“위에서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위로 물이 쌓이고 아래로는 물이 온전히 끊어졌다.
제2의 홍해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다.
언약궤를 뒤 따라 가면 길이 있다.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백성들은 요단강을 우회할 필요가 없었다.
혹시 어디가 수심이 가장 낮은지 지형조사를 할 필요도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길을 가는 데에는
바다도 강도 모든 것이 길이었다.
이제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장소인 언약궤가 가는 곳이면
수심 깊은 강도 길이 된다.
언약궤를 따라갔더니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다.

내 앞에 누가 있는가?
무엇이 있는가?
하나님이 계시는가?
하나님 말씀이 내 앞에 있는가?
나는 내가 가는 길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늘 다니던 길―늘 행하던 일―조차 쉽게 두려워하고 겁내고
큰 부담에 짓눌리기 일쑤 아닌가?
지금 이스라엘 백성은 나와 같지 않았다.
그들은 ―여호수아부터― 강하고 담대하고 두려워하지 않고 놀라지 않았다.
그들은 지나보지 못한 길을 걷지만,
행할 길을 아는 자다!
이것이 성도 아닌가!

여러 가지 해야 할 일로,
몇 개월 뒤에 마쳐야 할 과제로
마음에 부담이 많다.
지금까지 성실하게 준비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위축이 된다.
그러나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길은 언약궤를 따르는 데 있다.
하나님 말씀을 따르고 의지하며
오늘 성실히 순종하는 것이다.
그러면 몇 개월 뒤에 거기에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