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수아 8:18-29, 순종으로 바친 제사)

가나안의 정복은 정치적으로는 이스라엘의 해방과 독립, 건국이라는 대사건이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위해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을 이끄신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브라함의 선택과 그에게 부여하신 사명과 똑같은 맥락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죄악에 사무친 가나안 원주민, 일곱 부족이 심판받아야 하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야 한다.
이스라엘의 전투와 전쟁과 정복은
이스라엘의 땅을 넓히고 잘 먹고 잘 살기 위한 것을 최고의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미 첫 전투에서 분명히 하신 바와 같이
여리고 성의 정복은 이스라엘의 거주지 확보 이전에, 그리고 그 이상으로
그 성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제사의 의미가 있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 전쟁을 하는 것이다.
여리고 성을 하나님께 온전히 바치는 첫 제사는 사실 실패했다.
‘온전히’에 온전하게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간의 범죄는 200만 분의 1이라는 아주 경미한 비율의 범죄라고 해도
‘온전히’에는 절대적으로 미치지 못하는 불완전함이었다.
이스라엘은 불완전한 제사를 드린 것이다.
그것은 아간(과 가족들)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써만 완성될 제사였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이로써 겨우 온전한 제사가 보충적으로 완성되었다.

이제 두 번째 성, 아이도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제물이다.
다행히 이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성료되었다.
단지 승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았는데, 하나님의 뜻이 아닌데도
승리하는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승리가 곧 하나님의 뜻임을 입증할 수는 없다.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순종의 여부다.
그것은 순종이 승리를 보장하고 불순종이 패배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은 아니다.
승패여부는 순종과 불순종의 여부에 비례하지 않을 수 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 곧 성도는
승리로 부름을 받은 자라고 할 수는 없다.
단적으로 성도가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이요,
이미 예수께서 받으신 고난의 논리적인 귀결이다.
성도는 승리보다는 순종으로 부름을 받은 자다.
그것은 여리고 성에서도 그러했고 지금 아이 성에서도 마찬가지다.

여리고 성에서 온전히 바치는 것을 철저히 순종하지 못한 이스라엘은
아이 성에서는 심기일전하여 온전히 바치는 일에 순종하였다.
구체적인 전투 방식, 작전을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했고,
무엇보다 멸하라는 것, 취하라는 것을 말씀대로 구분하여 순종했다.
멸하라는 것을 아까워하며 인간적으로 이의를 제기하는 우를 범하지 않았고,
취하라는 것을 왜 이번에는, 이것은 취하라고 하느냐고 따지며
의도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다.
모든 명령에 하나님의 선하시고 깊으신 뜻이 있다.
그것을 신뢰하고 순종하면 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다.

그 결과는 승리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미 순종할 명령을 주셨고 그 결과도 말씀하셨으므로,
이스라엘이 승리한 것은 그들의 순종의 결과라기보다는
순종 뒤에 오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였다.
‘순종의 결과는 승리다’
이것은 자못 승리가 나의 업적이요 공로로 인식될 소지가 있다.
그렇지 않다.
아무리 온전히 순종을 해도 그 어떠한 것으로도
나는 하나님께 업적과 공로를 쌓은 것도 아니며,
내가 승리를 얻는다면 오로지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승리가 아니라 순종이다’라고 말해야 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