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32:17-32, 할례를 받지 못한 자 가운데)

오늘 본문에서는 애굽을 특별히 “할례”와 관련하여 지칭한다.
많은 민족과 부족들이 할례식을 행했다.
대부분 그 의미는 성년식으로 국한되었다.
이제 살을 베는 고통을 참아내는 사나이로서
동족의 방어에 책임을 질 성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할례는 이와 전적으로 달랐다.
그것은 생물학적인 성년과 상관없었다.
태어난 지 8일,
그것은 성년이 아니라 그냥 태어난 것 자체에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된 표시다.
할례의 본질적 의미는 구별에 있었다.
세상과의 구별,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구별.
그것은 물리적으로 몸에 칼을 대어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남게 하고
죽을 때까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표식이었다.

흔히 구약 이스라엘의 할례는 육신과 율법적 차원에서의 의미로 국한하고,
신약에 이르러서야 바울에 의해
몸이 아니라 마음에 하는 할례가 강조되면서
할례의 진정한 의미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발전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구약에서 이미 할례를 그러한 의미로 쓰고 있다.

오늘 본문은 “할례”라는 단어를 매우 많이 쓰고 있다.
9회가 나온다.
“할례를 받지 아니한 자”,
“할례를 받지 못한 자”,
“할례를 받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 자,
“할례를 받지 못하고 칼에 죽임을 당한 자”.
그런데 이들은 애굽을 직접 언급하는 것이 아니다.
애굽과 견주어서 언급되는 다른 사람들이 바로 이들,
“할례를 받지 못한 자”다.
그런데 애굽은 이들과 “함께 누울 자”며,
“함께 패망할 것”이다.
애굽은 할례를 받지 않은 자 “가운데에 엎드러질 것”이다.
그러면 애굽은 할례를 받았는데
이제 죄를 짓고 할례를 받지 않은 자의 운명으로 전락하는 것인가?
아니다.

할례와 관련하여 이 세상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할례를 받은 자와, 받지 않은(못한) 자.
여기서 할례는 남자 몸의 특정 부위에 가한 칼자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러하다면
어떤 의미로든 할례를 받은 부족들은 많고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가?
아니다.
또한 이스라엘과 같이 난 지 8일만의 할례만이 진정한 할례인가?
설령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구별되는 표로서 할례라 하더라도,
문제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든 남자가 태어나서 8일 만에 하는 할례는 다 치렀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면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할례란 몸의 표시로 행하려는 어떠한 구별도 아니다.
특정한 의복, 음식, 관습,
그러한 것으로는 진정한 구별이 되지 않는다.

구별은 단 한 가지에 의해 이루어진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는가, 아닌가!
이스라엘은 율법대로 할례식은 행했지만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았다.
다른 민족은 말한 것도 없다.
지금 계속되고 있는 애굽에 관한 말씀에서 문제는 무엇인가?
그들이 혈통적으로 히브리인이 아니어서인가?
그들이 율법의 의복이나 음식이나 관습을 행하지 않아서 문제인가?
그런 것은 이스라엘에서도 다 폐해졌다.
그러한 모든 외적 구별을 통해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보이시고자 하는 구별은
내적 구별이요 영적 구별이다.
그리고 이것에서 그들은 실패했다.

애굽은 바로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은 백성들의 반열에 들어갈 것이다.
나라의 강대함이나 아름다움이나 풍성함 같은 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진정으로 영적인 구별을 이뤘는가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의 사명,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자의 삶을 어떻게 살았는가,
이것이다.
음행, 교만, 우상숭배,
전형적인 인간사의 본질들은 모두 그에 반대된다.
두로도, 애굽도, 그리고 바벨론도,
그리고 이스라엘도 그러하다.
그들 모두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운명에 처한다.
애굽이 그들과 같이 된다.
이것은 또한 혈통상 이스라엘 백성이지만
하나님을 믿지도,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않는
방자한 자들 모두에게도 해당되는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