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27:1-25, 슬픈 자화상)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는 문제는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거의 변함없이 자신감 넘치는 자화상이
세상에서 성공을 보장하는 요소로 인정되었다.
역사에서 모든 강자들은 자신 스스로 강하다는 의식에 넘쳐있다.
자화상은 자신의 상태의 반영이기도 하면서,
반대로 자화상이 자신을 만들어가기도 한다.

두로는 자신에 대해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온전히 아름답다”
이것이 두로의 말이다.
두로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글자 그대로 용모의 빼어난 미모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보다 더 한 자랑을 내포하는 은유의 표현이다.
본문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는
“거래”요 “상인”이요, 그리고 거래 대상인 무수한 지명들이다.
두로는 당시 세계에서 무역중심국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두로를 ‘아름답게’ 했다.

어마어마한 상속을 받아서 엄청난 부자가 된 사람보다
더 큰 부의 힘은 활발한 거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움직이지 않는 부보다 더 힘 있는 것이 움직이는 부다.
움직이는 부는 “거래”를 통해 이루어지며
그것은 많은 사람과 나라들과의 관계를 전제하며,
그 관계의 중심에 선 것을 의미한다.
세상의 부가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이보다 더 큰 힘이 어디 있겠는가.
두로가 그러했다.

두로 자체가 가지고 있는 풍부한 자산이 있었다.
천연 조건이 빼어났고,
그것을 가지고 만들어내는 생산기술도 뛰어났다.
그리고 그것을 거래하기 위해 주변의 모든 나라들이
자신의 훌륭한 상품을 가지고 모여들었다.
다시스, 야완, 두발, 메섹, 도갈마, 드단, 아람, 유다, 이스라엘, 민닛, 워단, 아라비아, 게달, 스바, 라아마, 하란, 간네, 에덴, 앗수르, 길맛.
이들이 두로의 거래자였다.
이들이 “떼를 지어 네 화물을 나르니
네가 바다 중심에서 풍부하여 영화가 매우 크도다”
이들의 부와 영화는 사실이었고
그것은 자신이 “온전히 아름답다”는 자화상을 낳았다.
두로는 정말 온전히, 완전히 아름다웠다.

그러나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두로를 위해 슬픈 노래를 지으라”고 명하신다.
‘아름다운 노래’가 아니라 “슬픈 노래”다.
이유는?
두로가 잘못된 자화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두로의 자화상의 핵심인 ‘온전한 아름다움’이
사실은 자신의 뛰어남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진 피동적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진실을 말씀하신다.
“너를 지은 자가 네 아름다움을 온전하게 하였도다”
두로가 아름다운 것은 사실이다.
그것도 실제로 완전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러나 진실은 무엇인가?
두로 스스로 완전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사실이다.

두로의 자화상, ‘온전한 아름다움’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는 그 안에 전혀 하나님이 들어있지 않는 자화상을 발전시켰다.
그를 아름답게 지으신 하나님이 빠졌다.
두로에게는 자신의 완전한 아름다움만 남았다.
‘나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얼마나 부유한가!’,
‘나는 얼마나 강한가!’
이것은 곧 자기자랑이다.
그것도 ‘온전한’, 즉 ‘완전한’ 아름다움, 부, 강함의 자랑이다.
자신이 어떻게 해서 그러한 조건을 갖게 되었는지
근원, 바로 하나님의 창조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모든 것이 자신의 힘으로 된 것으로 자부하는 것이다.
인간 역사에서 강한 자들이 빠지는 함정이 바로 이것이다.
그 강함의 근거를 자신에 두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 그리는 자화상은 곧 교만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그것은 결코 온전히 아름답지 않은,
오히려 ‘슬픈 자화상’일 뿐이다.
누군가가 “슬픈 노래”를 지어줘야 하고,
그가 결국 “슬픈 노래를” 불러야 할 ‘슬픈 자화상’이다.